야화 40화
야화 40화
말이 끝 나기 무섭게, 땅바닥에 그늘져 있던 그림자가 꼿꼿이 일어 나기 시작을 하였다. 그리고 그림자가 한발 두 발 발을 떼는데 쿵 쿵 땅이 울리며 발 자국이 한뼘 이상 푹푹 파여 나갔다.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일이며, 간이 오그라들고 진땀이 나며 귀신을 본듯한 공포에 휩싸여 뒷걸음질 쳤다. 대장 격인 장수만은 그 공포를 이겨 내고 그 자리에 버티고 서 있었지만 그 밀려 오는 공포 마져 감출 수는 없었다.
"복면을 벗고 조용히 돌아가도록 하세요. 생업에 종사를 하다 보면 잊혀지는 날도 있을 거에 요"
"고맙소! 수 없이 전장을 달려 다녔지만, 무서움이 무엇이라는 것을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호생지덕(好生之德)에 감사를 드립니다"
일단의 무리들이 얼굴을 가렸던 복면을 벗으며, 공주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썰물 빠지듯 모두가 빠져 나가는데 장수 한 사람만이 그 자리에 꼼짝 하지 않고 서 있었다.
"그대는 왜 가지 않는가? 할말이 남아 있는가?"
위엄이 무럭무럭 피어 올랐다. 어디에 숨겨 두었던 위엄이란 말인가. 보고 있는 사람의 고개가 저절로 수그러지지 않을 수 없는 위엄이었다. 장수가 그 위엄에 굴하여 한쪽 무릎을 꿇었다.
"태산을 앞에 두고도 바로 보지 못하고 죄를 범했습니다. 벌하여 주십시오"
"호호호... 내가 태산에서 반 년을 살았더니 태산이 되었나 보군요! 장수는 아무에게나 무릎을 꿇는 것이 아니랍니다 일어 나세요"
위엄은 어디로 가고, 철 없는 소녀로 돌아 왔다. 시종 지켜 보고 있던 취아선이 장탄식을 토했다.
"아아! 피는 속이지 못하는 구나...내가 오늘 용을 보았도다"
"호호호... 면구스럽게 시숙까지 이러기에 요?
"아니다...무림에서 백 년 가까이 늙은 내가, 등에 진땀을 흘려 보기는 오늘이 처음이다"
"피이~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 구요! 진짜 무서운 것은 황이라 구요"
"저 놈도 그림자가 일어 선다는 말이냐?"
"그 뿐인 줄 알아요? 호호호... 그대가 내 뒤를 따르겠다는 심정은 알 겠지만, 아직 시기가 아니에요! 식솔이 있다면 식솔과 함께, 북경의 연왕부를 찾아가서 내가 보냈다고 하세요"
"식솔은 없지만 믿고 쓸만한 심복은 여섯이 있습니다"
"몇 십만이 넘는 마교와 싸움을 벌이고 있다는 것을 알 텐데 도, 기어이 나를 따르겠다는 말인가요?"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다면 내치셔도 상관 없습니다"
"호호호... 그렇게 사람을 위협하는 것이 아니에요...나를 따라다니다 보면, 우선 저 늙은이를 하루에도 열 두 번은 죽이고 싶을 텐데 참을 수 있겠어요" "주인 어른이..."
"주인이 아니고 그냥 아씨... 그래, 그래! 그냥 아씨라고 불러요. 그리고... 그리고...황은 뭐라고 불러야 하지요?"
"나 말이오? 그냥 소협(小俠)이라고 부르면 되지 않겠소?"
"키키키...용골은 어디로 가고 소협이냐?"
"노형님! 잊으셨소? 여의주를 물어야 용골이 된단 말이오"
"이 놈아! 오늘 보니 여의주를 물었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호호호...시숙! 갑자기 왜 이러지?"
"아니다 아니야! 그 동안은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거야"
"어떻게 잘못 보았는데?"
"철딱서니 없는 망아지로만 알았지 뭐냐?"
"히힝 히히힝... 히히힝..."
"그래 그래! 망아지 울음 소리로는 아주 잘 어울린다..."
"보았지요? 이것이 인간의 본 모습이에요! 공주네 뭐네 하고 체면 치레 하는 것이 싫어서, 야인이 되어 무림에 몸을 담고, 야생마의 아낙이 된 것이지요. 공주라는 생각을 버리고, 귀여운 막내 동생을 돌 본다는 심정으로 나를 보살펴 주면 될 것이에요. 여기 있어요. 이것이면, 수하 여섯을 거느릴 수 있는 당분간의 노자는 될 것이에요. 제남까지 가는 동안 앞서거니 뒤서거니 우리를 보살펴 주면 고맙겠어요"
"홍택호로 가신다고 들었습니다. 거기에서 뵙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열 번 스무 번 칭찬을 해도 모자라겠구나. 정말 사내들도 너만한 사내는 보기 어려울 정도다"
"호호호... 뭐가 그리 대단한데? 늘어지게 칭찬을 할 것이 뭐가 있다고..."
"아니다! 나만 같아도 여기 오기 전에, 이러이러하니 적도들이 닥칠지 모른다고 한 두 마디쯤은 사전에 귀띔을 하였을 것이다. 그 것을 혼자 마음 속에 담고 있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모두 가 다 알고, 이제나저제나 언제 밀어 닥치나 하고 조바심을 할 것 뭐 있겠어"
"그러니 네가 대단하다는 것 아니냐"
"나 혼자라면 그럴 수 있나? 곁에 든든한 두 사람이 있으니 내가 태연할 수 있는 것이지"
"아니다! 파안섭영의 섭영신공이라는 말만 들었지, 오늘 실제로 보지 않았다면 믿지를 않았을 것이다. 누가 있어 너희 두 사람을 대적 할 수 있겠느냐?"
"한 사람 있잖아!"
"나 말이냐? 히히히...그래서 이 몸이 위대하다는 것은 전 무림이 다 아는 것 아니냐 히히히..."
"호호호... 그 위대한 것이, 콩알만 하지 않았으면 더 위대해서 펑 하고 터져 나갔을 텐데 호호호..."
"쯧!...꼭 그렇게 소금을 뿌리고 김을 빼야 하겠느냐?"
"개 고기를 삶았으면 김을 빼야만 하는 것 아냐? 잠깐..."
우마차에 모자로 보이는 여인과 열 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이가 나란히 누워 있는데 얼굴에 포진(疱疹)이 나 있었다. 공주의 얼굴 빛이 핼쑥해지며 당황을 하였다. 우마차를 몰고 가는 남자에게 물었다.
"어디로 가는 길이오?"
"왜 그러시오? 의원을 찾아 가는 길이외다"
"내가 의원이니 멀리 갈 것 없습니다. 얼른 집으로 돌라 갑시다. 나도 뒤 따르겠소"
품 안에서 황령어패(皇令御牌)를 꺼내 얼른 청아수의 손아귀에 쥐어 주면서 전음으로 다급하게 말했다
(위소(衛所)에 찾아 가서 영패를 내 보이고 군사를 모두 풀라고 이르세요. 모두 입을 가릴 수있는 입 마개를 준비하라 이르고, 내가 지시하는 마을 주위는 철저히 통제를 하라고 이르세요. 두창(痘瘡)이라는 유행병인데, 전염성이 강해서 순식간에 퍼져 나가며, 수만 명이 죽어 나갈지도 모르는 무서운 병이라고 이르세요. 호신강기로 몸을 보호하고, 공기로 전염 되는 것이니 입과 코를 가리도록 하세요)
(너희들은?)
(우리 걱정은 하지 말고, 집과 마을을 알게 되면 황을 위소에 보낼 것이니...)
(그럴 것 없소! 내 그림자가 그대 뒤를 쫓으면 될 것이고, 노형님은 내가 가면서 설명을 하면 개방에서도 할 일은 있을 것이오)
황령어패는 손바닥만한 크기인데, 앞면에는 황(皇)자가 양각 되어 있었고, 뒷면에는 령(令)자가 양각 되어 있는 금패였다. 이 금패는 황제가 직접 어림한 것과 같은 권위를 가지고 있으며 삭관탈직(削官奪職)은 물론 그 자리에서 처형도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무상의 영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