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그 자리에 1부
언제나 그 자리에 1부
“ 아, 아버지...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이모..! 이모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 미, 민아...그게...”
“ 처형...잠시만 자리를 좀 비켜 줄래요? 민이하고 둘이서만 나눌 이야기가 있어서요...”
“ 휴~~ 알았어요, 제부...그리고 민아~? 아, 아니다, 나중에 이야기를 하자꾸나...”
민은 뼈만 앙상하게 남은 아버지의 얼굴을 보면서 가슴 속으로는 통곡을 하고 있었다.
왜 미처 눈치를 못 챘던 걸까?...
자신이 엄마를 잃었다면 아버지는 20여 년을 같이 살아온 반쪽을 잃어버렸었는데....
어째서 아버지의 아픔은 전혀 생각지를 않고서 혼자만 도망을 가버렸던 걸까?...
그건 어쩌면 엄마를 죽게 만든 게 자신이고 아버지의 여자를 훔쳤었다는 죄책감 때문에,
그 슬픔을 핑계로 삼아서 그냥 현실도피를 해버렸던 단순한 이기심뿐이었을지도 모른다.
“ 그래...이제 제대가 얼마 안 남았지?...”
“ 아버지...”
“ 다행이다..그래도 마지막으로나마 널 이렇게 볼 수가 있게 되었으니...”
“ 아버지~~ 흑...죄송해요......이렇게 될 줄은...제발 그런 말씀은 마세요....흑흑.....”
“ 아니야...그래도 네가 건강해 보여서 이젠 마음이 놓여...
사실 전에도 말은 안 했었다만 난 이미 오래 전에 간암말기 판정을 받았었어...”
“ 아...버지...”
민은 눈물이 흘러내리는 줄도 모르고 침대 위에 누운 아버지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또, 가장 소중한 사람 중에 한 명을...
아니 이제는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아버지마저 떠나 보내야만 한다는 건가?...
“ 기억하니? 전에 내가 널보고 이제는 엄마를 맡길 수 있어서 든든하다고 했던 말?..”
“ 하, 하지만 그때 아버지는 분명히....”
“ 그래...건강검진 결과가 아주 멀쩡하다고 말했었지...하지만 그건 거짓말이었어...
정밀 재검진을 받았지만 이미 그때는 다른 장기로까지 전이가 된 상황이라 손을 쓸 수가 없다고 하더라..
그러고도 별 탈없이 2년 가까이를 더 살았으니...오히려 의사가 놀래더구나...
그건 아마도 이렇게 널 만나게 해주기 위해 네 엄마가 곁에서 지켜준 것만 같아...
참, 이모한테는 너무 그러지 말거라...내가 일부러 연락을 하지 못하게 했어...
너도 얼마나 힘이 들었으면....휴가도 반납하고 면회까지 모두 거절했다며?...”
“ 크흑~~ 죄송해요....정말, 정말로 죄송해요....”
민은 엄마의 유골을 뿌린 후에 사실은 자살까지도 생각했었다.
하지만 마지막에 엄마와 했던 약속을 떠올리고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서 휴학과 동시에 입대를 해버렸다.
그리고 뒤늦게 그걸 알아낸 민지 누나가 찾아왔었지만 민으로서는 엄마가 고통 속에 죽어갈 당시에,
자신은 그녀와 알몸으로 뒹굴고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도저히 그 관계를 계속 이어갈 수는 없었다.
그러고도 몇 번을 찾아왔었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민지 누나뿐만이 아니라
큰 이모와 학교 친구들 그리고 하숙집 형들까지 모두의 면회신청을 거절했다.
2년 가까이가 흐른 지금에 말년 휴가를 나왔을 때까지 휴가는 물론 외출, 외박까지 모두 반납했었다.
하지만 그 결과가 지금 아버지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모습을 간신히 지켜볼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엄마로 인해 받았던 상처가 어느 정도 아물어가는 중이라 그나마 다행이라고나 해야 할까?...
그렇더라도 엄마에 이어 아버지의 임종마저 못 지켰다면 정말로 모든 걸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 민아....”
“ 흑~~ 네, 아버지....”
“ 열심히 살아야 한다....”
“ 아, 아버지....흐흑~~”
“ 네가 뭘 힘들어하는지..또 왜 그렇게 세상을 피해서 도망을 친 건지...나는 잘 알아..
사랑하는 여자를 잃는다는 건....정말로 죽고 싶을 만큼이나 괴로운 일이지....”
“ 아, 아버지?...”
민은 고개를 숙이고 울먹이는 자신의 머리를 힘없이 쓰다듬으며 아버지가 나지막하게 뱉는 말에,
등줄기에다가 얼음덩어리를 집어넣은 것 같이 냉기가 쫙 흐르면서 그대로 몸이 굳어져버렸다.
“ 그때 내가 네게 한말은 진심이었어...엄마를 네게 부탁한다는 말...
엄마로서만이 아니라...여자로서도 믿고 맡긴다는 이야기였어....”
“ 아...버지...어떻게.....”
“ 민아...”
“ ....네...”
“ 그건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란다...난 이미 그때 너와 네 엄마, 두 사람의 사이를 인정했었어...
너라면 충분히 행복하게 해주리라 믿었었지...
난 네 엄마가 너무나 탐이 나서...엄마의 아름다운 시절을 다 뺏어버렸었거든...
그래서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는 그 벌을 받는다고 생각하면서도...
네 엄마가 너와 사랑에 빠지고는 하루하루를 행복해하고 다시 젊어지는 것만 같아서 위안이 되었단다...
“ 흑흑~~ 아버지..죄송해요....”
“ 그랬는데....휴~~ 결국엔 우리가 네 엄마를 끝까지 지켜주지를 못했지....
내가 마지막까지 묻어두고 가려 했던 이 이야기를 굳이 다시 꺼낸 이유를 알겠니?..”
“ 흑흑...네....”
“ 그래..그래...그러면 됐어...더 이상 걱정은 하지 않으마...
참...제대하고 나면 썰렁하게 빈집에 있지 말고 복학 때까진 이모네에 가서 지내...
그리고 나중에 여러 가지 문제는 이모가 알아서 다 처리해줄 거다...
미리 그렇게 이야기가 되어있으니까....이모의 말을 잘 듣고...알았지?...”
“ 아, 아버지...제발.....”
“ 휴~~ 힘들구나...이모를 좀 들어오시라 그럴래?..”
큰 이모는 병실 밖에서 초조하게 앉아있다가 민이 고개를 내밀자 화들짝 놀라서 일어섰다.
“ 처형....제가 말씀 드렸던 것들...꼭 좀 부탁을 드릴게요...”
“ 흑~~ 제부....알았어요..걱정하지 마세요....”
“ 민아....”
“ 네...아버지...”
“ 잊지 말아라...아빠와 엄마가 널 언제나 지켜보고 있다는 걸...용감하게 앞으로 나아가야 해...”
“ 흑흑...아..버지...알았어요....”
“ 나...조금만 잘게....졸리는구나...”
그렇게 아버지는 조용하게 잠이 드는 것처럼 민의 곁을 떠나갔다.
큰 이모는 민이 전처럼 또 쓰러지지나 않을까 못내 걱정스러워하면서도
민이 끝까지 꿋꿋하게 버텨내자 그제서야 민의 가슴에 안겨서 울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엄마가 세상을 떠난 지 꼭 2년 만에 민은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아버지의 유골을 들고서 엄마를 떠나 보냈던 이곳으로 다시 올라왔다.
“ 엄마~...아버지가 가면 따뜻하게 안아줘야 해...알았지?
아버진 모든 걸 알고 계셨대...그러면서도 우릴 용서했었...흐흑~~흑.....”
결국 민은 아버지의 유골을 뿌리다 말고서 오열을 토하고 말았다.
“ 민아...정말 우리랑 같이 지내지 않을 거니?...”
“ 이모..미안해...나 도저히...이곳에 모르는 사람이 들어와 살게 할 수는 없을 것 같아...”
“ 휴~~ 네 아빠가...꼭 부탁했는데...혼자 남을 널...외롭게 두지 말아달라고....흑~~..”
“ 이모..걱정하지마...여기에 있으면 아버지랑 엄마와 같이 있는 것만 같아서 오히려 마음이 푸근해...
정 그렇게 걱정이 되면 이모가 자주 들리면 되잖아? 나 복학 때까지는 거의 집에만 있을 건데...
이것저것 짐 정리도 해야 하고....휴~~ 싸서 넣어 둘 건 넣어두고...”
“ 그래...알았어...네가 정 그러고 싶다면 어쩔 수 없지...
네 이모부가 상속 문제는 세금까지 싹 다 처리했으니까 그건 걱정하지마...
이 집은 네 명의로 변경했고 나머지 현금, 예금, 보험금 이런 건 한꺼번에 정리해서 네 계좌를 만들었다던데...받았지?..”
“ 응...이모...이모부한테도 인사를 드려줘...나중에 좋은 술을 사 들고 찾아 뵌다고...”
“ 이 녀석이? 가족간에 인사는 새삼스럽게 무슨 인사야?...그냥 자주 놀러나 오면 그게 인사지...”
회계사이신 이모부가 민을 대신해서 유산 문제를 정리해 주었다.
어차피 아버지의 유언이 문서로 남아있었기에 크게 문제될 부분은 없었지만,
세금이나 명의변경 등등 귀찮은 문제들이 제법 있었는데도
이제는 정말로 고아가 되어버린 민이 애처로웠던지 발벗고 나서서 완전히 정리를 해준 것이었다.
그리고 민은 아파트를 처분하고 같이 지낼 것을 권유하는 이모 부부에게 사양을 하고 혼자 지내기로 결정했다.
이 집에는 남아있는 추억이 너무나 많았기에 도저히 남의 손길에다 맡길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리를 하고 나니 제법 큰 액수가 되는 현금은 이모부의 조언에 따라
이리저리 분산해서 장기간 예치해두면서 정기적인 수익을 얻을 것과 그때그때 쓸 돈으로 나누었다.
“ 민아...그러면 내일 또 올게....저녁은 다 해두었으니까...국만 덥혀 먹어...”
“ 이모도 같이 먹고 가지...”
“ 아니야..난 집에 가서 이모부랑 먹어야지...”
“ 헤헤~~ 아직도 두 분은 신혼 같아....”
“ 이 녀석~~ 늙은 이모를 놀리기는?”
민은 자신을 안아주고서 돌아서는 이모의 뒷모습에서 엄마를 보는 것 같아 눈시울이 붉어졌지만
그걸 보면 이모가 걱정을 할까 봐 애써 참다가 이모가 나가고 나자마자 결국엔 쏟아내고 말았다.
엄마와 연년생인 큰 이모는 정말 엄마를 다시 보는 것처럼 너무나 닮아있었다.
어릴 때는 그저 외모만 닮은 줄 알았는데 엄마의 내밀한 곳까지 모두 알고 난 지금에는
은은하게 풍겨 나오는 그 체취마저 비슷하다는 걸 깨닫고서 마음이 더욱 저려왔다.
민은 제대하고 나서 사회에서의 첫날밤을 이렇게 고향집에서 혼자서 쓸쓸하게 맞이하고 있었다.
“ 이모부 감사합니다...덕분에 제가 별로 신경을 쓸 게 별로 없었어요...”
“ 녀석~ 그런 거야 내가 늘 하던 일이라 별로 어려운 것도 아닌데 뭘?...
뭐..밑의 직원을 시켜서 심부름을 몇 번 보낸 게 다인데...너무 그러니까 어색하다...
그래..이제는 마음이 좀 가라앉았어?”
“ 네...그럭저럭 지낼만해요...”
“ 우리와 같이 있자니까? 우린 둘 뿐이라서 적적하기도 하고...
나야 늘 바쁘니까 네가 이모랑 말 친구도 해주면 좋겠구먼...”
“ 여보~~ 놔 두세요..제가 그렇게 이야기를 해도 당분간은 그냥 그렇게 지내고 싶대요..”
“ 이모부, 대신에 제가 종종 사무실로 찾아갈 테니까 술이나 가끔 사주세요...”
“ 하하하...맞다...남자는 군대를 다녀오고 나면 진짜 어른이 된다고 했지?..
그래...네가 오면 내가 쓴 소주 한잔이야 못 사주랴? 언제라도 오거라...”
“ 에~~? 이모부, 회계사들 연말소식지에 보면 랭킹에 실릴 만큼 잘 버신다면서...겨우 소주~요?”
“ 이 녀석이 눈치가 없기는? 네 이모가 있는 데서는 물론 그렇게 말하지만...
네가 오면 당연히 쫙~ 빠진 애들이 나오는....”
“ 여보~~옷~!! 도대체 지금 애를 데리고 무슨 소리에요?”
“ 아이쿠~~ 봤지?”
“ 아~~...알았어요...제가 갈 때는 꼭 쓴 소주만 사주세요...킥킥~~”
“ 그럼~~ 우리는 원래 쓴 소주만 먹어......큭큭~~”
“ 이 남정네들이~? 그냥 밖으로 쫓아내는 수가 있어요...”
“ 아이~~ 이모~~오, 나 배고파, 목도 마르고~ 응? 내가 가져온 술 맛있는 거야, 이모도 같이 한잔해...”
“ 아휴~~ 알았어...술상을 차려올게...”
민은 부모님들의 유품을 정리해서 보관할 건 잘 싸서 보관하고 기타 잡다한 것들은 모두 태워버렸다.
그렇게 하나 둘 정리를 해나가면서 추억들을 되새기다 보니 어느덧 일주일이 흘러갔다.
그 사이에 이모가 두어 번 다녀갔지만 그나마 매일 오려는 이모를 만류했기에 그 정도였다.
그리고는 약속한대로 정리가 다 끝나자마자 양주를 사 들고 인사차 찾아온 것이었다.
“ 이~모오~부...제~성..해요~오....”
“ 하하...아니야...어서 들어가서 누워...네가 그 동안에 힘든 일이 너무 많아서 그런 거야...그냥 푹 자거라...”
“ 헤헤~~ 제서~엉...”
그 동안 억지로 힘들게 버텨온 게 거의 한계에 다다른 걸까?
아니면 이제는 돌아가신 부모님을 빼고 나면 그나마 가족이라고 할만한 유일한 두 사람의 앞이라서 긴장이 풀어진 탓일까?
민은 호쾌하게 시작했던 것과는 반대로 몇 잔술에 이모부는 고사하고 이모보다도 먼저 취해서 해롱거리고 있었다.
그리고는 그 커다란 덩치를 작은 이모의 몸에 매달려 비틀대며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누웠다.
“ 엄마~아~~....헤헤~~”
“ 어머? 미, 민아~?..”
다혜는 끙끙대며 조카인 민을 겨우 침대에다 눕히고서 이불을 덮어주려다가
갑자기 자신의 목을 끌어당겨 품에다 안아버리는 힘센 두 팔 안에 갇혀서는,
당황해서 버둥거리다가 엄마를 찾는 술 취한 목소리를 듣자 그만 온몸에 힘이 쭉 빠져버렸다.
“ 후아아~~ 엄..마...냄새가 좋아....엄...마...엄....마.....아...푸~우~~”
“ 흑~ 민..아~~ 이 불쌍한 것~~ 흑흑~~”
그리고는 이미 반쯤 잠에 빠져든 민이 자신의 젖가슴에다 얼굴을 비비며 킁킁거리고 손으로 잡아오는 걸 알면서도,
다혜는 그걸 뿌리치기는커녕 마음이 너무나 아파 꼭 끌어안으면서 혹시나 잠이라도 깰까 소리를 죽여 눈물을 흘렸다.
“ 엄..마...사랑..해....”
“ 흑..흑...”
애기처럼 젖가슴을 조몰락거리며 잠꼬대로 연신 엄마를 찾는 조카를 보며 눈물짓던 다혜는
완전히 잠이 들었는지 자신에게서 손을 떼고 돌아눕는 민에게 이불을 덮어주고는 방을 나섰다.
“ 당신 왜 그래? 울었어? 휴~~ 하기야...나도 저 녀석을 보고 있으면 가슴이 찡 한데....당신이야...쯧쯧...”
“ 흑흑...너무 불쌍해서....흑흑....”
“ 그래...아직도 어린데...졸지에 천애고아가 되다니.....휴~~ 대신에 우리가 잘 챙겨야지...
마침 우리는 자식이 없으니까 늦게나마 아들이 하나 생긴 샘 쳐야지....
사실 우리가 저 녀석 때문에 처제를 은근히 부러워했었잖아?
아직은 힘들겠지만 시간을 두고 정식으로 우리 호적에 올리는 것도 한번 생각을 해보자고...”
“ 흑~ 여보..고마워요...그렇게까지 생각해 주신다니...”
“ 에이~~ 나도 저런 든든한 아들이 있으면야 너무 좋지....
하여튼 나도 신경을 쓰겠지만 당신이 더 많이 챙겨야 할거야...
유별나게 가까웠던 모자였잖아? 말은 안 해도 엄마를 무척이나 그리워할 거야...”
“ 훌쩍~ 네..알아요...안 그래도 좀 전에도 잠결에 엄마를 찾더라고요....그래서...훌쩍~”
“ 그래...당신이 눈물을 흘렸겠군...후~~
그래도 당신이 처제랑 닮은 점이 워낙 많으니까 서로 도움이 많이 될 거야...
당신도 곧 생길 아들이랑 미리 친해둔다고 생각을 하고...알았지?..”
“ 네...여보...”
다혜는 그렇게 눈물이 글썽한 채로 조카가 잠들어 있는 방문을 돌아다보며 죽은 동생부부를 떠올리자 가슴이 메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