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맛-13
남자의 맛-13
“아앗…!”
그녀의 속살을 가르고 안쪽까지 파고든 뜨거운 페니스가 그녀의 안에서 휘저어지자 은서가 몸을 바르르 떨며 뜨겁게 숨을 내뱉었다.
이한에게 뒤에서 밀어 붙여질 때마다 은서의 가슴이 어지럽게 출렁거렸다.
이한에게 밀어 붙여질 때마다 은서가 체크무늬 시트에 매달려 솟구쳐 오르는 희열에 아찔한 숨을 흘려낸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 뜨거워질 수 있을까.
사람의 몸이 이렇게 뜨거워질 수 있는 것일까.
사람의 심장이 이렇게 세차게 뛸 수 있는 것일까.
이러다가 심장이 터지면 어떻게 하지?
남녀 관계에 대한 온갖 미사여구에 대해서 이제야 비로소 동감을 느끼는 은서였다.
끓어오르는 불길 속에 갇힌 듯한 뜨거움.
그런데 서로를 상처 입히지 않는 뜨거움.
아무리 뜨거워도 서로를 다치게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서로의 마음을 더 가득 채워주는 뜨거움. 그리하여 이것이 사랑.
“하아, 하아. 사랑해요, 정말, 정말 많이 사랑해요.”
그녀의 등에 뜨거운 숨을 토해놓으며 이한이 숨 가쁘게 속삭여온다.
그 사랑한다는 속삭임에 그녀가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감격해서가 아니었다. 너무 좋아서, 온몸이 설탕에 절여진 것처럼 좋아서 눈물이 나왔다.
너무 맛있는 것을 먹었을 때 짜릿한 나머지 눈물이 나는 것처럼, 너무 유쾌하게 웃었을 때 너무 웃은 나머지 눈물이 나는 것처럼,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하읏, 읏, 읏…!”
뜨겁게 신음하며 엉덩이를 들어 올린 은서의 모습에 도저히 멈추지 못할 만큼 흥분해버린 것은 이한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안쪽은 너무나 뜨거워서 그의 분신이 드나들 때마다 행복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빼내지 말아달라고 비명을 지르는 분신을 빼내고 다시 들이밀 때마다 그녀의 안에서 달콤한 거품 섞인 애액이 흘러나온다.
그녀의 허벅지를 타고 흐르는 그 젖은 물기조차 달콤하게 보였다.
마치 꿀에 담갔다가 빼낸 것처럼 사랑스럽게 달콤한 여자.
세상에 누가 있어서 이렇게 숨소리마저 달콤할 수 있었다.
이 달콤한 숨소리에 취해서 멈출 생각도, 멈출 수 있는 의지도 잃어버린 이한이 그녀의 허리를 두 손으로 잡고 그대로 허리를 돌려댔다.
그럴 때마다 은서의 허리가 휘어지며 그녀가 황홀하게 신음했다.
이대로 새벽이 올 때까지 쉼 없이 사랑해도 모자랄 것 같았다. 아니, 새벽이 오는 것이 원망스러워질 것이다.
다행히 두꺼운 커튼이 쳐져 있으니 새벽이 오는 것도, 아침이 오는 것도 모를지 모른다.
출근을 위해 맞춰 둔 알람이 울리겠지만 이 뜨거운 신음에 그것마저 먹혀버린다면 어쩌면 두 사람은 내일 지각을 할지도 모를 일이다.
“하읏, 읏… 이, 이한…! 아아…!”
은서가 시트에 매달려 정신없이 숨을 헐떡이며 이한의 이름을 불렀다.
뜨거웠다.
밀고 들어오는 그의 페니스도 뜨거웠고, 닿아 있는 살갗도 뜨거웠고, 등으로 쏟아지는 숨결도 뜨거웠고, 허리를 잡고 있는 그의 손도 뜨거웠고, 무엇보다 가장 뜨거운 것은 그 남자였다.
이름을 부른 것만으로도 아찔해져버린 이 남자. 세상에서 가장 포근하지만 동시에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남자. 오직 그녀에게만 뜨거워지는 남자.
그녀에게만큼은 링 위에서 보여준 그 뜨거움을 보여주는 남자.
한때 이 남자의 전부였던 링처럼, 지금은 자신이 이 남자의 뜨거움의 전부라는 생각에, 오직 자신만이 이 남자를 뜨겁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에 은서가 지독한 쾌감에 사로잡히며 허리를 움찔거렸다.
“하아… 하아.”
그녀의 안에서 페니스를 뺀 이한이 그녀를 돌려 눕혔다.
숨을 헐떡이는 은서의 시선이 마찬가지로 숨을 몰아쉬는 이한의 눈과 마주쳤다.
두 사람 모두 한껏 상기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먼저 웃은 것은 이한이었다.
숨을 헐떡이는 은서를 내려다보던 이한이 살짝 웃으며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땀으로 얼룩진 은서의 뺨에 이한의 손이 미끄러졌다.
“힘들어요?”
이한의 물음에 은서가 고개를 저었다.
“정말 안 힘들어요?”
“이한 씨는 힘들어요?”
“숨이 잘 안 쉬어져요.”
이한의 대답에 은서가 가만히 웃는다.
“나도 그래요.”
은서의 대답이 나오는 순간 이한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포개진다.
뜨겁게 달아오른 두 사람의 입술이 포개지며 서로의 혀를 정신없이 탐하기 시작했다.
서로의 달콤한 숨결을 훔치며 땀으로 흠뻑 젖은 서로의 손가락을 얽고 깍지를 낀 손을 마주잡은 두 사람이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면 더 선명해지는 이것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상대방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눈을 감으면 더 선명해지는 이것을.
뜨겁게, 그리고 달콤하게 키스하며 맞잡은 손 아래로 서로에게 스며드는 온기가 맞닿은 가슴과 하체에까지 이어졌다.
“멈추고 싶지 않아요.”
잠시 입술을 떨어뜨리고 속삭이는 이한의 말에 은서가 기쁘게 웃으며 다시 그의 입술을 빼앗는다.
“멈추면 화낼 거야.”
그녀의 속삭임이 이한의 입안에서 퍼졌다.
땀으로 젖은 다리를 들어 올려 이한의 허리를 감은 은서의 안으로 다시 뜨겁게 꿈틀거리는 페니스가 치고 들어왔다.
아래에서 치고 들어오는 달콤한 전율에 은서가 이한의 등에 두 팔을 두르고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는다.
그녀의 뜨거운 숨이 이한의 어깨에서 물방울이 되어 맺혀갔다. 그 뜨거운 살결을 느끼며 은서가 문득 생각했다.
‘망사 팬티… 어떻게 하면 입히지?’
하지만 짓궂은 생각도 잠시, 뜨겁게 밀려올라오는 절정감에 은서가 이한의 허리를 감싼 다리를 바르르 떨며 소리를 높이고 말았다.
뜨겁고 달콤한 신음소리였다.
*
“싫어요, 절대 안 돼요.”
샤워를 마치고 나온 이한이 고개를 저었다. 이것만큼은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문제였다.
은서가 망사 팬티를 손에 들고 생글 생글 웃으며 서 있는 모습이 이한의 눈에는 꼭 저승사자처럼 보인다.
“그, 그런 걸 어떻게 입어요?!”
“내가 입은 건 보고 싶다면서요.”
“은서 씨는 여자고 난 남자고.”
“어허, 그 무슨 성차별 발언을. 망사 속옷에 남자 여자가 어디 있다고 그래요?
그리고 약속했잖아요. 간지럼 참기 지는 사람이 망사 속옷 입기로. 이한 씨 졌으니까 입어야죠. 사람이 약속도 안 지키고 말이야.”
“.....”
이한의 이마에서 땀이 뻘뻘 흘러내렸다. 거실에 에어컨도 돌아가고 방금 전 씻고 나왔는데 이렇게 땀이 줄줄 흐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망사 팬티를 들고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는 은서를 피해 이한이 뒷걸음질 쳤다. 과연 이 남자는 그날 진짜 망사 팬티를 입었을까?
*
“은서 씨, 뭐해요?”
욕실에서 나오지 않는 은서 때문에 이한이 문을 가볍게 노크했다. 이미 따끈한 아침을 차려놓은 이한이었다.
출근하기 전에 ‘밥’을 먹고 싶다는 은서의 바람에 이한이 아침마다 요리사를 자청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욕실에 들어간 은서가 쉽게 나오지 않는다.
“이러다가 지각해요.”
이한이 시계를 번갈아보며 다시 한 번 노크한다.
끼익.
욕실 문이 열리며 은서가 그제야 나온다. 욕실에서 나오는 그녀의 표정이 이상야릇해서 이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 있어요?”
“아, 아뇨.”
대충 대답한 은서가 식탁에 가서 앉는다. 하지만 어딘가 멍해 보이는 그녀의 표정이 걱정이 되지 않을 리가 없다.
게다가 은서가 아침밥까지 절반 이상 남기자 이한의 걱정이 부풀어 오른다.
평소에는 밥을 남기는 법이 없는 그녀가 오늘은 한두 숟가락 뜨고 만 것이다.
“미안해요, 속이 안 좋아서.”
작게 웃어 보이고 옷을 갈아입겠다고 방으로 들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에 이한의 얼굴에 걱정이 피어오른다.
분명 무슨 일이 있는데 말을 해주지 않으니 모르는 것이다.
“가을 타나?”
바야흐로 9월. 무더웠던 여름의 기승을 부리던 더위가 한풀 꺾이고 저녁으로는 제법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가을의 초입. 아직 가을을 타기에는 이른 계절이지만 여자의 마음은 또 모르는 법이다.
여름에는 은서와 함께 지원을 데리고 동해안에 잠시 다녀왔었다.
가족끼리 바다 여행에 오는 건 처음이라는 그녀의 말에 그도 처음이라고 고백했다.
가족끼리 하는 여행이 처음이었던 것이다. 같이
여행할 가족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족이 생긴 첫해 첫 여름, 가족들과 함께 다녀온 바다는 푸르고 아름다웠다.
비록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긴 했지만 그래도 어딘들 즐겁지 않을 수 있으랴.
“산에라도 가자 그럴까?”
이한이 이런 저런 고민을 하며 식탁을 치우고 있을 때, 은서는 과연 무엇을 하고 있을까?
“난 몰라, 난 몰라.”
침실로 들어간 은서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고 호들갑을 떤다. 너무 긴장하고 놀라서 밥도 제대로 입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다.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이한이 뭐라고 말하는 건지 하나도 귀에 들리지도 않았다. 그만큼 놀란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녀의 손에 들린 작은 막대기는 바로 임신 테스트기. 생리가 와도 벌써 와야 하는데 생리가 없어서 혹시나 하고 어제 퇴근길에 약국에서 산 것이다.
아침 첫 소면이 더 정확하다는 사용 설명서에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바로 욕실로 달려가 테스트를 해본 것이다.
그리고 1초가 1시간 같은 기다림이 지나고 나서 테스트기에 그어지는 선명한 두 개의 붉은 줄은 그녀의 몸에 새 생명이 생겼다는 걸 알려줬다.
새 생명. 지금 그녀의 안에 또 다른 심장이 뛰고 있다는 증거.
“어쩜 좋아.”
은서가 좋아서 발을 동동 구른다. 이한과 미리 약속했던 것이다. 그가 자격증을 따기 전이라도 아이가 생기면 바로 결혼식을 올리기로 말이다.
배가 불러서 웨딩드레스를 입기는 싫다고 일단 아이가 생기면 어떤 이유를 불문하고 바로 혼인신고하고 결혼식을 올리기로 미리 약속을 받아 놓았었다. 그런데 생긴 것이다. 진짜로 생긴 것이다.
“어머, 어머, 어머, 어머. 좋아서 죽을 것 같아, 나 어떡하지?”
얼굴 표정이 관리가 되지 않는 은서가 좋아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때 침실 문이 열리고 이한이 들어온다.
이한이 들어오는 순간 은서가 얼른 손에 들고 있던 테스트기를 주머니 안에 넣어버린다.
아직은 알려주기 싫은 것이다.
이런 것은 서프라이즈, 깜짝 놀라게 해주는 것이 정석이 아니던가.
저녁에 밖에서 외식을 하자고 그를 불러내서 깜짝 놀라게 해주자 생각하며 은서가 표정 관리에 들어간다.
‘딸일까, 아들일까? 어떡하지? 엄청 예쁠 거 아냐. 우와, 우와, 어떻게 하지?’
은서가 갑자기 자기 배가 사랑스럽게 보이기 시작했다. 이 배 안에 사랑스러운 생명이 있다고 생각하니 배까지 사랑스러워지는 것이다.
“은서 씨, 정말 이상한데, 정말 아무 일도 없어요?”
그녀의 평소와 다른 표정에 이유도 모른 채 이한이 계속 물어온다. 아무래도 뭔가 일이 있는데 말해주지 않는 것이다.
“정말 아무 일도 없어요. 정말이라니까요.”
아무 일 없다는 은서를 이한이 가만히 끌어안는다. 그 와중에도 은서가 배가 눌릴까 봐 슬며시 엉덩이를 뒤로 뺀다.
아직 배가 눌려서 아이가 지장 받을 그런 개월 수도 아닌데 어쩐지 그래야 할 것 같은 것이다.
“나한테 숨기는 거 있어요?”
남자의 직감이란. 누가 직감은 여자의 전유물이라 했던가. 남자도 이렇게 촉이 발달할 수 있는 데 말이다.
“숨기는 거 없어요. 내가 뭘 숨기겠어요.”
대답하면서도 은서가 조금은 양심에 찔린다. 지금 말해버릴까 싶다가도 겨우 참는 것은 인내의 결과가 달콤하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이 행복을 공개하는 건 저녁으로 미뤄야 한다.
“자, 출근해야 하잖아요.”
은서가 발꿈치를 들어 이한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하고 그의 팔에서 벗어난다.
룰루랄라 거리며 옷을 갈아입는 은서의 모습을 뒤에서 이한이 불안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
“정말이야? 대박!”
혜주가 은서를 바라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일 먼저 혜주에게 임신 소식을 알려준 것이다.
“그럼 이제 결혼하는 거야? 은서 씨?”
“응, 결혼할 거야. 진짜로.”
“좋겠다. 그럼 결혼식 들러리는 내가 서도 되지?”
“그렇게 해줘. 그런데 혜주 씨는 결혼 안 해?”
“아직. 태경 씨가 말이 없네. 좋겠다, 은서 씨는. 우리보다 나중에 사귀었는데 벌써 결혼하고, 애도 생기고. 나도 벌써 서른인데 대체 나는 언제 결혼하나.”
“금방 할 거야. 태경 씨도 준비 중이겠지.”
“결혼하면 회사 그만둘 거야?”
“그래야겠지? 난 가정에 집중하고 싶어.”
“좋겠다.”
혜주가 계속 좋겠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오늘 퇴근하고 나서 병원에 들러서 다시 확인해보고 저녁에 이한 씨에게 말할 거야.”
“축하해, 은서 씨.”
“고마워.”
혜주의 축복을 받으며 은서가 손으로 배를 어루만졌다.
아직은 느껴지지 않지만 이 안에 정말 생명이 있다는 사실에 그녀의 가슴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처음 느끼는 이상한 두근거림이었다.
*
“아, 형.”
누가 찾아왔다는 말에 앞치마를 한 채로 가게 밖으로 나온 이한이 반가운 얼굴을 보며 활짝 웃었다. 미래 체육관의 코치 강선호였다.
“여긴 웬일이셔요? 근처 볼 일 있으신 거였어요?”
그렇지 않으면 선호가 일부러 여기까지 찾아올 이유는 없다. 요즘은 한 달에 두 번 정도 체육관에 나가는 이한이다.
본인이 운동하기 위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태경을 돕기 위해서였다.
태경이 다이어트를 위해 복싱을 하고 싶다는 말에 체육관을 소개시켜주고 가끔 함께 가주는 것이다.
“아니, 관장님이 너 만나보고 전해주라는 말이 있어서.”
“관장님께서요?”
“너 지금 바쁘지 않지?”
“네. 괜찮아요.”
선호가 앞치마를 맨 이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는 두 손 가득 밀가루를 묻히고 있었다.
“빵 만드는 건 재미있어?”
“네, 재미있어요. 저 지난주에 제빵기능사 자격증 합격했어요.”
“그래?”
“네. 이제 다음 달에 제과기능사 시험 봐요. 빨리 배운다고 사장님이 좋아하세요.”
“그럼 뭐, 혼자서 케이크 같은 것도 만들고 그래?”
“아직은 잘 못 만들어요. 자격증은 시작이고 차차 배워가야죠. 배울 게 엄청 많아요.
학교 일찍 중단해서 배우지 못한 걸 한꺼번에 배우는 그런 느낌이라니까요.”
“그래도 적성에 맞나 보네.”
“그런데 형, 하려는 이야기는.”
“아, 그게.”
선호가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다음 달에 시합 하나 있어. 관장님이 너 알려주라고 하셔서.”
“시합이요? 저 이제 복싱 안 해요.”
“선발전이야.”
“네?”
선발전이라는 말에 이한의 눈이 커진다.
“작년에 너하고 붙어서 이긴 녀석 있잖아, 선발전 결승전에서 붙었던 놈, 그놈이 폭력 사건에 휘말려서 대표 자격 상실했다고 하더라.
그래서 밴텀급 다시 선발전 한대. 관장님은 이게 마지막 기회라고 하시더라. 그래서 네가 할 마음이 있는지 한번 알아보라고 하셨어.”
“선발전.”
이한이 믿기지 않는 듯 중얼거렸다.
“이기면 내년 올림픽에 나가는 거야. 할 마음이 있어?”
“누가 나와요?”
“기회가 좋아서 이번에 체급 낮춰서 나오는 녀석들도 많고, 체급 올려서 나오는 녀석들도 많아. 기회가 이번 한 번뿐이니까 다들 장난이 아니야.”
“나 운동 많이 쉬었는데.”
“한 달 정도 있으니까 체중 조절해가면서 다시 트레이닝하면 해볼 만하지 않겠어?”
“다음 달에 제과기능사 시험이라서.”
“시험은 그다음 달에도 볼 수 있지만 선발전은 이게 마지막이야. 고민해봐. 내일까지 접수 서류 받으니까 생각해보고 할 마음 있으면 전화 줘.”
할 말을 마친 선호가 가게 안을 힐끔 들여다본다.
“할 말은 다 했고, 빵이나 좀 사가야겠다. 난 이제 체급 조절할 일도 없으니까 마음껏 빵이나 좀 먹어보련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는 선호의 뒤를 따라 들어가는 이한의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단팥빵 맛있어요.”
선호에게 맛있는 빵을 추천해주며 이한이 이것저것을 함께 담는다.
“이건 체육관 식구들에게 주는 선물. 같이 가져가세요.”
“덤이야? 덤 치고는 너무 많잖아.”
“괜찮아요. 제가 선물하는 거니까.”
“잘 먹을게. 전화해.”
“네, 가세요.”
돌아가는 선호에게 허리를 숙여 이한이 인사를 한다. 문이 닫히고 난 후에도 이한이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빠져 나오지 못했다.
‘선발전.’
그 말이 귓속에, 머릿속에 맴돌고 있었다.
케이크를 나르면서도, 그 위에 휘핑크림을 바르면서도 내내 머릿속은 선발전에 관한 것이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저녁 시간 가게를 나서며 이한이 주인 내외에게 인사를 했다.
오늘은 은서와 저녁 식사를 밖에서 하기로 약속해서 평소보다 조금 일찍 퇴근하는 이한이었다.
오늘은 꼭 밖에서 밥을 먹고 싶다고 은서가 장소까지 잡고 전화를 해왔기 때문이다.
약속 장소로 걸어가며 이한이 고민했다.
선발전에 참석할 것인가 아니면 아예 생각도 하지 않고 그냥 제과기능사 자격증 시험을 볼 것인가 하는 고민.
이제 와서 다시 시작하려는 것이 우스웠다. 한 번 떠난 길인데 다시 시작한다는 건 말도 안 된다고 이한이 생각했다.
다시 도전하더라도 이길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복싱은 파벌이 심한 경기다. 파벌이 실력을 떠나서 승패를 좌우하는 것이다.
한 방이 아니면, 판정으로 또 지난번처럼 질 수도 있다.
확률은 희박하다. 그 희박한 것에 걸기에는 지금 그에게는 소중한 가족이 있다.
은서와 지원. 그 소중한 가족들을 두고 다시 결과를 알 수 없는 링 위로 돌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없던 걸로 하자.”
내일 아침 선호에게 전화를 걸어 하지 않을 거라는 말을 하자 생각하며 이한이 약속 장소인 생선구이 집으로 들어갔다.
은서와 처음으로 같이 밥을 먹은 생선구이 집이었다.
*
“네?”
순간적으로 이한이 자기가 무슨 말을 듣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은서가 뭐라고 말하는 데 그게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다.
“2개월이래요.”
뭐가 2개월이라는 것일까? 2개월? 2개월 할부로 뭔가를 샀다는 뜻일까?
“2개월이 뭔데요?”
순진한 남자의 대답에 은서가 살짝 웃으며 생선살을 발라 이한의 앞 접시에 얹어 준다.
“우리 아기.”
“네?”
‘아기’라는 단어가 이처럼 생소하게 들린 것은 처음이다.
이한이 ‘아기’가 뭘까 하고 잠시 생각했다가 손에 들고 있던 젓가락을 떨어뜨렸다.
“아기라고요. 우리 아기. 이한 씨 아기, 내 아기.”
“아… 기.”
떨어뜨린 젓가락을 집으려는 이한의 손이 덜덜 떨린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일생일대의 대사건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오늘 병원 갔다 왔어요. 2개월이래요. 건강하고, 심장도 잘 뛰고 있고. 사진 볼래요?”
“.....”
너무 놀라 말도 하지 못하는 이한에게 은서가 핸드백에서 사진을 꺼내 건네준다.
이한이 자기 손에 들린 흑백 사진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어디의 어디가 아기라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사진 안에 있는 것은 그저 작은 점에 불과했다.
작은 점을 하나 찍어놓고 그게 아기라고 그녀는 말하고 있다.
이 작은 점이 자신과 그녀의 아기라고. 이렇게나 작은 점이.
“이건 점인데.”
이한이 말도 안 된다는 듯 중얼거리면서도 계속 사진을 쳐다본다.
“점이잖아요. 아기가 아니라. 팔 다리도 없고.”
“처음이라서 그래요. 처음엔 이렇게 점처럼 보이다가 나중에 머리도 생기고, 팔 다리도 생기고, 얼굴 표정도 보인데요. 신기하지 않아요?”
“점인데… 팔 다리가 생기고.”
뭔가 이상한 말을 듣는다는 듯 중얼거리던 이한이 옆에 있던 물 컵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물을 마시려던 이한의 손에서 물 컵이 미끄러졌다.
“앗, 이한 씨.”
놀란 은서가 물수건을 건네주자 이한이 허둥거리며 젖은 바지를 닦기 시작했다.
젖어버린 바지를 닦으며 이한이 숙인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이상한 것은 계속 바지를 닦고 있는데 바지가 여전히 젖어 들어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위에서 뜨거운 눈물이 계속 굴러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을 쏟은 바지를 닦으며 이한이 고개를 숙인 채 계속 울고 있었다.
마침내 어깨를 들썩이며 울게 될 때까지 은서가 그 남자를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녀는 웃고, 그는 울고.
“점인데.”
울면서 이한이 작게 중얼거렸다. 점인데,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점인 것이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점을 이제까지는 본 적이 없다. 점이, 이렇게나 예쁘게 보일 줄 누가 알았을까.
“이 아이 태명을 그럼 점으로 할까요? 점이? 점아? 쩜. 어때요?”
은서가 놀리듯이 하는 말에 이한이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며 그제야 웃는다.
“점이 좋아요. 점이.”
“변점.”
은서의 말에 이한이 손으로 입을 가렸다. 눈가에 눈물이 그렁한 채로 그만 이한이 크게 웃고 말았다.
“똥점.”
은서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이한을 사랑스럽게 쳐다봤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런 남자와 가장 사랑스런 아기를 얻은 그녀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라고 생각하며 그녀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
탁. 조용히 문을 닫고 나온 이한이 살짝 뒤돌아봤다.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게 현관을 닫고 나온 이한이었다.
아직 은서는 잠이 들어 깨어나지 않았다. 깨기에는 이른 새벽 네 시.
어젯밤은 오래도록 이야기를 한 두 사람이었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태어날 아이에 대한 것이었다.
아이가 태어나면 이렇게 하자, 저렇게 하자 그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열두 시가 훌쩍 넘겨 잠이 들어버린 은서는 이한이 침대에서 빠져나오는 것도 모르고 곤하게 자고 있었다.
이한이 후드를 가볍게 뒤집어쓴다. 오랜만에 신은 러닝화가 가볍다.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으로 가볍게 뛰어 내려가는 이한의 발끝이 가벼웠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이사하기로 결정을 했다.
이 집은 은서에게는 부모님과의 추억이 담긴 곳이지만 새롭게 이룰 가정을 위해 옛 추억은 잠시 양보하기로 한 것이다.
태어나는 아이에게 뛰어놀 수 있는 마당을 주고 싶다는 은서의 마음과, 마당에서 강아지를 키우며 아이와 함께 놀게 해주고 싶다는 이한의 마음이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겨울이 되기 전에 마당이 넓은 집으로 이사를 하고 아이가 기어 다니기 좋게 집안의 턱을 없애는 리모델링까지 한 다음 새로운 가족을 기다리기로 했다.
시골에 있는 집으로 이사하면 어떻겠냐는 은서의 말에 그건 이한이 거절했다.
이제 막 시작한 과자와 빵을 더 배우고 싶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진짜 자신의 제과점을 열 수 있도록 지금은 이곳에서 열심히 배우고 싶은 이한이 그건 거절했다.
주중에 이 집을 부동산중개소에 내놓기로 하고 잠이 들었지만 사실 이한은 밤새도록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이가 생겼다는 말을 듣는 순간 가슴 한구석에서 뭔가가 뭉클거렸기 때문이다.
아이.
아이가 생겼다는 것은 자신이 아버지가 된다는 뜻이다.
아버지.
이한에게 있어서 ‘아버지’란 낯선 이름이다. 어머니에 대해서는 그나마 지원이에게 들어 조금은 알고 있지만 아버지는 생소했다.
지원의 아버지가 자신의 아버지는 아니기 때문에 그에게 아버지는 여전히 낯선 이름이었다.
그런 자신이 아버지가 되는 것이다. 자신의 그늘 아래서 자신을 올려다보며 아이가 자라는 것이다.
이한이 생각했다. 자신은 아이에게 어떤 아버지가 될 것인가. 아이의 눈에 어떻게 비쳐지는 아버지가 될 것인가.
밤새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생각하게 되었다.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가 되고 싶다고. 아이가 자랑스러워할 아버지가 되고 싶다고.
아이가 자라면서 분명 절망하고 벽에 부딪칠 날이 올 것이다. 그때 아이는 어쩌면 자신에게 물어올지도 모른다.
-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도저히 뛰어넘을 수가 없어요.
아이가 그런 문제에 부딪치는 날이 올지도 모를 일이다.
그때 아이에게 당당하게 말해주고 싶다. 아버지는 뛰어넘었다고, 이겨냈다고 말해주고 싶다.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지만,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스스로에게 좌절하지도 않고, 안 된다 물러서지도 않고 이겨냈다고, 이뤄냈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해야 할 일이 있는 것이다.
먼저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게, 스스로에게 미안하지 않게. 그래야만 아이에게도 아빠는 이렇게 살았다 말해줄 수 있을 것이기에.
“후아, 후.”
가볍게 호흡을 조절하며 이한이 아직은 어두운 새벽 거리를 달린다.
가끔 지나가는 자동차들의 불빛만이 어두움을 밝히는 거리의 가로등 아래를 달리며 이한이 웃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새벽바람이, 오랜만에 느끼는 달리는 발의 감촉이, 그리고 따뜻한 미래를 그리는 그의 가슴이 그를 웃게 만들고 있었다.
*
“말할 게 있어요.”
출근을 위해 준비하고 식탁 앞에 앉은 은서를 향해 운동을 마치고 돌아와 씻고 나온 이한이 입을 열었다.
은서는 이한이 차려준 따뜻한 된장찌개를 한 입 떠먹고 있었다. 이 여자, 입덧이라는 것도 없다. 입덧 대신 왕성한 식욕이 변화라면 변화랄까.
“다음 달에 시합 하나 있는데, 거기 나갈까 해요.”
“시합이요?”
시합이라는 말에 은서가 눈을 들었다.
“대표선발전이 다음 달에 있어요. 관장님이 거기 나가보지 않겠냐고 하셔서, 고민 끝에 나가기로 했어요. 은서 씨와 미리 상의하지 않은 건 미안해요.”
“난 이한 씨가 운동 계속하는 거 반대 안 해요.”
“계속하지는 않아요.”
이한이 믹서 안에 당근과 브로콜리를 넣는다.
“다만 뭔가에 실패했다는 기억을 가지고 계속 살기는 싫어서 그래요.
아마 이 기회를 그냥 넘겨버리면 난 아마도 앞으로 계속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미련을 가질지도 몰라요.
더 해볼 수 있었는데 포기했다는 아쉬움, 미련. 그런 걸 가지고 살기는 싫어요.
그래서 이 한 번에 진짜 모든 걸 다 쏟아 부어보고 싶어요.
그런 다음 그 열정을 가지고 빵을 만들 거예요.”
“솔직히 말하자면.”
은서가 생글거리는 웃음을 입가에 떠올리며 살짝 혀를 내민다.
“난 이한 씨가 어떤 모습이든지 다 좋지만, 밥 해주는 모습도 좋고, 빵 만드는 모습도 좋고, 밤에 뜨거운 모습도 다 좋아하지만 역시 가장 가슴이 두근거리는 건 링 위에서 땀 흘리는 모습인 것 같아요.”
“네?”
“사람은 좋아하는 일을 할 때가 가장 빛난대요. 이한 씨는 링 위에서 가장 반짝반짝 빛이 나요. 그러니까 같이해도 좋을 거라고 생각해요.
굳이 이걸 위해 저걸 포기하는 거 말고, 복서가 운영하는 제과점. 더 어감이 좋지 않아요? 난 그것도 좋다고 생각해요.
이 한 번으로 끝내지 말고 이한 씨, 할 수 있을 때까지 계속 복싱해도 좋을 거라고.”
“하지만.”
“그리고 아이에게도 복싱을 가르치는 거예요. 요즘 학교 폭력도 심각하다는데 여자 아이건 남자 아이건 어려서부터 복싱 가르쳐서 자기 몸 자기가 지키게 만드는 것도 좋잖아요?”
“그것도 그러네요.”
“그러다가 또 세계 챔피언 나오면 가문의 영광이고.”
헤헤헤 웃는 은서를 바라보던 이한이 그만 같이 웃고 말았다.
“그러면 당분간 제과점은.”
“양해를 구하고 조금 일찍 퇴근하려고요. 새벽에 운동하고 저녁부터 밤까지 운동하고 오전과 오후에게는 제과점에 출근하고요.”
“와, 빡빡하겠다. 그럼 우리 사랑은 언제 하지?”
은서의 말에 이한의 얼굴이 붉어진다.
“그럼 한 달 동안 나 독수공방 하는 거예요? 그건 좀 싫다.”
“임신 초기에 조심해야 한대요. 그러니까 겸사겸사 한 달 정도 건너뛰는 걸로.”
“아앙… 그거 싫은데.”
살짝 애교 섞인 투정을 부리는 은서에게 이한이 믹서로 간 녹즙을 건네준다.
“꼭 이겨서, 정식으로 프러포즈할게요.”
정식으로 프러포즈. 동거는 시작했지만 아직 정식으로 프러포즈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결혼할 것이다.
시합에서 이기고, 그 승리를 가지고 그녀에게 프러포즈하자 다짐하며 이한이 빙그레 웃었다.
반지보다 빛나는 트로피를 안겨주며 아내가 되어달라고 정식으로 말하자고.
*
“뭐 보고 계셔요?”
뭔가를 들여다보며 혼자서 실실 웃고 있는 서진이 수상쩍어 보였는지 지원이 서진의 어깨 너머로 슬쩍 그가 보던 걸 훔쳐본다.
“뭐야, 조카 사진 보고 있어요?”
서진이 보고 웃던 것이 여자 아이 사진이라는 걸 알고 지원이 실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숨겨둔 애인 사진이라도 보는 줄 알았는데 겨우 코흘리개 꼬맹이 사진인 것이다.
“아니, 내 딸.”
“에?”
딸이라는 말에 지원의 눈이 커졌다. 이 남자, 총각인 줄 알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딸이라 그러니 놀랄 수밖에.
“결혼하셨어요?”
카페가 집인 남자다. 한 번도 부인 얼굴은 본 적도 없다. 그런데 결혼했다는 것이 지원에게는 충격인 것이다.
처음 이 카페에 한 번 와봤던 지원은 이제 이 카페에 거의 둥지를 틀다시피 하고 있었다.
평일에는 수업 마치고 바로 카페로 와서 공부를 하고 저녁까지 먹고 집으로 돌아가는 지원이었다.
밥도 주고 커피도 주고 조용하니 공부하기에도 딱인 이 파리 날리는 카페가 어지간히 마음에 드는 것이 아니다.
하루에 손님이라고는 열 손가락 안에 꼽히니 이곳은 카페가 아니라 독서실이라고 지원이 말한 적도 있었다.
그리고 그 평일 중의 절반은 지원의 룸메이트인 민규도 함께 이 카페를 점령한다.
그리고 주말이 되면 진짜 이 카페는 지원과 민규의 세상이 되는 것이다.
지난주부터 하나씩 하나씩 자기들 물건을 카페로 옮기기 시작한 민규와 지원이었다.
그동안 대여해왔던 스피커와 악기들을 하나씩 돈을 주고 구입해서 카페 한구석으로 갖다 놓는 이유는 이 카페에서 라이브 공연을 하려는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카페 사장인 서진이 굴러온 돌에 내쫓긴 박힌 돌 신세다.
영악한데다 넉살까지 좋은 새파란 어린애에게 휘둘려 정신을 차려보니 이 어린애가 카페 주인 행세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붙임성이 좋아서 밉상은 아니다.
“이혼했어.”
“돌싱남이네.”
“얘 이름은 세나야. 우세나. 예쁘지?”
“엄마 닮았나 보네요?”
아무렇지 않게 던지는 지원의 한마디에 서진의 얼굴이 잠시 가라앉았지만 이내 싱긋 웃는다.
“성격은 나 닮았어.”
“어, 그래요? 고약하겠네?”
“.....”
한마디도 지지 않는 지원을 서진이 째려본다. 어린 것이 말을 얼마나 잘하는지 모른다. 말을 잘해 밉기까지 한 것이다.
말 잘하기로는 서진도 어디에 꿀리지 않는데 이 스무 살짜리 새파란 어린 애는 말을 잘하는 데다 당돌하기까지 하다.
“애가 예쁘면 다시 재결합할 확률이 높다던데, 다시 합칠 생각인 거예요?”
“아니.”
“왜요?”
“애 엄마가 다른 남자하고 사귀고 있어, 결혼을 전제로.”
“아이구, 사장님 차였구나.”
“내가 찬 거지, 내가 차일 사람으로 보여?”
“결과적으로 차인 거예요. 여자는 딴 남자랑 재혼하는데 사장님은 재혼할 여자 없잖아요. 그러면 남들이 보기엔 다 사장님이 차인 걸로 보여요.”
“애 엄마 재혼하면 세나를 내가 데려올까 생각 중이야.”
“애 엄마가 그래도 된데요? 여자들은 보통 자식 데리고 가지 않나?”
“물론 전적으로 세나 의견을 따르기로 했어. 세나가 엄마하고 살고 싶다고 하면 내가 포기하고, 세나가 나하고 산다고 하면 내가 키우기로. 누구하고 살든 보고 싶을 때면 얼마든지 만날 수 있으니까 상관은 없지만 말이야.”
“애는 여자가 키우는 게 좋데요. 남자 혼자 애 키우면 애도 불쌍하고 남자 재혼 길도 막히고.”
거기까지 말한 지원이 피식 웃는다.
“우리 엄마 얘기예요. 우리 엄마가 그랬거든요. 여자는 애 떼어놓으면 마음이 그렇대요.
한테는 말한 적 없지만 엄마 살아생전에 혼자서 많이 우셨어요.
아빠한테도 나한테도 이유 말해주지 않고 엄마 혼자 우신 적이 많았어요.
난 그때는 엄마가 왜 우셨는지 몰랐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형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형이 보고 싶어서, 그런데 아빠와 나한테는 차마 말하지 못하고.
그러니까 애는 엄마가 키우게 해요. 안 그러면 세나 엄마도 혼자서 울지 모르니까.”
“야, 안지원.”
서진이 사진을 지갑에 넣으며 지원을 힐끗 쳐다본다.
“네?”
“너 진짜 이한 씨하고 친형제 맞아? 둘이 유전자검사 해봤어?”
“왜요?”
“달라도 너무 달라서.”
“뭐가요?”
“그냥. 애늙은이 같아. 너희 형은 귀여운데 말이야.”
“형은 철이 없는 거고 난 철이 든 거죠.”
“말 한마디 져주는 법이 없지?”
“져줘야 해요?”
지원의 대답에 서진이 말을 말자, 하며 카운터로 돌아간다. 그런 서진을 쳐다보고 있던 지원이 뭔가 생각난 듯 카운터에 기댄다.
“우리 형, 시합 나간대요.”
“시합?”
“네, 다음 달에 선발전 있는데 거기 나간대요. 다 늙어서 다리 안 풀리려나 몰라.”
“복싱 선수는 서른 살 넘어도 선발전 뛴다는데?”
“그래요?”
“너, 너희 형 시합 뛰는 거 한 번도 못 봤지?”
“사장님은 봤어요?”
“봤어. 딱 한 번.”
“괜찮았어요?”
“음.”
괜찮았냐는 지원의 물음에 잠시 생각하던 서진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