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맛-10
남자의 맛-10
“두 분 모두 사고로 돌아가신 지 이 년이 넘었어요. 햇수로 삼 년째로 접어들었으니까.”
은서가 담담하게 말을 꺼냈다. 이한의 팔을 베개 삼아 누워 그녀가 천정의 거울을 올려다보며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아빠 엄마 모두 독자에 외동딸이라서 가까운 친척들도 없었고, 장례식 내내 나 혼자였었죠. 조문객은 참 많이도 다녀갔었어요.
아빠 회사 분들, 엄마 동창 분들. 그리고 아빠 동창 분들에 군대 동기들… 우리 회사 직원들.
그런데 이상하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주고 북적거리는 그 장소에서 마치 나만 홀로 서 있는 기분이 들었으니까.”
그때의 느낌을 새삼 떠올리며 은서가 잡고 있는 이한의 손을 만지작거린다.
굳은살이 박인 손가락이 그녀의 부드러운 손가락에 기분 좋게 얽혔다.
“사람들이 웅성웅성거리고, 모두가 위로의 말을 해주고, 등을 두드려주고, 가슴 아프다는 표정을 지으며 내 손을 잡아 주는데 난 혼자 어둠 속에 서 있는 느낌이었어요.
마음 한 구석에서 알고 있었거든요. 지금 내 손을 잡아주며 위로해주는 이들은 그들을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면 더 이상 내 아픔을 기억하지 않을 거라는 걸요.
기다리고 있던 가족들과 맛있는 저녁식사를 하는 동안에 이미 장례식장의 나는 그들의 기억 속에서 잊힌 존재가 되어버릴 거라는 걸요.
밀물처럼 다가왔던 이들은 결국 썰물처럼 떠나가고, 어두운 밤 장례식장에 혼자 남아 주위를 둘러보면 내 곁에는 아무도 없었죠. 아무도.”
같이 살고 싶다고 그녀가 그에게 말했다.
같은 집에서, 같이 잠들고, 같이 눈 뜨고, 하나의 홀더에 두 개의 칫솔을 꽂고, 그가 쓰는 면도기가 그녀의 클렌징폼 옆에 놓여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가장 아래쪽 서랍을 열면 그녀의 팬티와 그의 팬티가 나란히 정리되어 있고 옷장 안에는 체크무늬 잠옷이 두 벌 나란히 걸려 있으면 좋겠다고.
쓰레기 버리는 날이면 이불 안에서 대신 쓰레기를 버려달라는 투정도 부리고 싶다고 그녀는 말했다.
“그때부터 혼자가 된 것 같았어요. 지금 내 곁에 있지만 결국은 나에게 머물 사람들이 아니라는 걸 느끼는 순간부터 외로웠던 것 같아요.
그들에게는 그들이 돌아갈 사람들이 있고, 나는 그들에게 있어서 창문 밖의 이방인일 뿐이라는 걸 느끼는 순간부터사람에 대한 거리감이 생긴 것 같아요.
누군가를 마음으로 만나는 것이 두렵고, 누군가에게 마음을 꺼내 보인다는 것이 두렵고, 그러면서도 혼자라는 사실에 외롭고, 외로우면 외로운 만큼 책상 위에 가족사진을 올려놓은 사람들이 더 부러워지고, 부러운 나머지 애써 그들의 행복을 외면하게 되고, 외면하며 혼자 겉돌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고.”
그녀가 이한의 손을 꽉 잡는다.
“난 이제 더 이상 외롭기 싫어요. 날 더 이상 외롭게 두지 말아요.”
잡아오는 그녀의 손길에, 그녀의 목소리에 이한이 그제야 깨달았다. 왜 그녀가 자신을 붙잡았는지. 왜 자신이 그녀에게 붙들렸는지.
지독한 외로움이, 외로움을 알아본 것이리라. 서로의 외로움이 서로를 끌어당긴 것이리라.
혼자 있어 외로운 두 사람이 누구도 잡아주지 않는 그 손을 서로에게 내민 것이리라.
“나하고 같이 살아요. 우리 둘이서.”
언젠가는 진짜 청혼을 하리라 이한도 마음먹고 있었다.
은서의 옷을 처음 벗기던 그날, 반드시 이 여자와 결혼하겠다고 마음먹었었다. 결혼할 생각이 없었다면 그때 옷을 벗기지도 않았다.
함께 살을 섞던 그날, 이미 마음으로 청혼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아직은 먼 어느 날의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자신이 준비되면, 그녀에게 어울리는 남자가 되면, 그때의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지금은 아니라고, 아직은 아무것도 준비된 것이 없다고, 더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그의 손을 잡은 여자는 지금이 그때라고 말하는 것이다. 다가올 어느 날이 아니라, 지금이라고.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지금이라고.
“지원이 방도 있으니까.”
어쩌면 이한이 주저하는 것이 지원이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그녀가 얼른 지원이를 입에 올린다.
“나 지원이도 좋아하니까.”
“시간을 조금만 더 주면 안 될까요?”
이한이 망설임 끝에 대답했다.
“난 아직 준비가.”
“무슨 준비가 필요해요?”
“결혼, 대충하고 싶지 않아요. 쫓기듯이 대충하고 싶지는 않아요. 준비해서, 아름다운 신부로 만들어주고 싶어요. 아름다운 신부에게 어울리는 그런 남자가 되어서, 손… 잡아주고 싶어요.”
“그러면.”
은서가 그를 향해 돌아눕는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동거부터 해요. 그건 괜찮죠?”
“네?”
“미리보기예요. 결혼 미리보기. 싫다고 하면 나 삐칠 거야.”
“지원이한테.”
예쁘게 벌어진 그녀의 입술을 바라보며 이한이 작게 대답했다.
“말해볼게요.”
그리고 그녀의 입술을 살며시 포갠다. 다정한 숨결이 그의 입안으로 스며들어오고 있었다.
어쩌면 서로가 알지 못하던 시간에 서로의 곁을 스쳐 지나간 적도 있었을지 모른다.
만원 버스의 부대끼는 그 사람들 안에서 나란히 손잡이를 잡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느 식당에서 서로 등지고 앉아 식사를 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서로가 알지 못하던 시간, 스쳐 지나가도 돌아보지도 않았을 그런 시간, 무수하게 많았을 그런 시간을 걷고 걸어, 걷고 또 걸어 마침내 서로를 알아보게 되었을 때. 그의 그림자 안으로 그녀가 걸어 들어오고, 그녀의 그림자 안으로 그가 손을 내밀었을 때, 비로소 서로가 서로에게 의미가 되었다.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오직 단 두 사람만이 서로의 의미가 되었다.
그 눈짓이, 그 미소가, 그 손짓이 서로에게 의미가 되었다.
더 이상 타인이 아닌, 세상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서로를 위한 단 한 사람이, 단 하나의 의미가 되었다.
이것이, 사랑.
“사랑해요.”
그가 처음으로 그녀에게 고백했다. 사랑한다는 그 첫 고백에.
“나도… 사랑해요.”
그녀 역시 처음으로 남자에게 고백했다.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고백을 비로소 할 수 있게 되었다. 당당하게 사랑한다고. 진짜 사랑하니까.
*
“그래서, 그만 뒀어? 용감하네, 이한 씨?”
작고 귀여운 잔에 담긴 새카만 악마의 커피를 내놓으며 서진이 의외라는 듯 이한을 쳐다봤다.
“오후로만 할 수 있는 새 알바를 찾으려고요. 할 수 있는 게 많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찾아보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생활이 힘들지는 않겠어?”
서진이 의자를 끌어당겨 이한의 앞에 앉는다.
어차피 손님도 없는 이 한적한 카페의 유일한 손님이 이한이기 때문에 손님과 여유 있게 커피를 마신다 한들 누가 뭐라 그러겠는가.
이한이 에스프레소 잔을 들어 살짝 한 모금 마시는 걸 보는 서진의 눈이 짓궂게 휘어진다.
절대로 이 남자에게 순한 커피를 줄 생각은 없기 때문이다.
커피를 넘길 때마다 그 이마가 살짝 구겨지는 것을 서진은 좋아한다.
나름 표시내지 않으려고 애써보지만 뻔히 다 드러나는 그 쓰다는 표정을 보는 것이 좋다.
“많지는 않지만 모아놓은 것이 조금은 있어요. 지원이 대학 등록금하려고 한 것도 지원이가 장학금 받아서 그대로 있고, 매달 조금씩 모은 것도 있고, 당분간은 괜찮을 것 같아요. 그리고 오후로 알바할 거니까.”
“하긴, 그동안 너무 무리하긴 했어. 이한 씨가 무슨 철인도 아니고 밤낮으로 너무하긴 했었지. 그러면 따고 싶은 자격증이라도 있어?”
“일단 내가 잘할 수 있는 게 뭔가부터 생각하려고요. 잘할 수 있고, 또 하고 싶은 것.”
“복싱이네.”
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서진이 대답한다. 이 남자에게 그보다 더 잘 어울리는 그림은 없기 때문이다.
“그건 빼고요.”
이한이 작게 웃었다. 이미 편의점과 건물 청소일은 그만둔 지 며칠이 지났다.
은서에게서 같이 살자는 말을 들은 후, 고민 끝에 정리한 것이다.
지금 하고 있는 배달 알바도 새로운 알바가 구해지면 그만두기로 이미 말을 해놓았다.
가게의 주인 형이 아쉬워하긴 했지만 이한 나름대로 고민한 끝에 결정한 일이었다.
은서가 원하는 대로, 아침과 저녁을 그녀와 함께 보내기 위해서였다.
지금 자신이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원하는 아침과 저녁, 그리고 함께 하는 온전한 시간을 그녀에게 선물하자고.
이번 주말에 그녀의 집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결정을 내렸다.
짐이라고 할 것도 없어서 이사라는 거창한 말을 쓸 것도 없다.
몇 개 안되는 옷 박스와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담은 박스 몇 개가 짐의 전부다.
지원은 지금 살고 있는 집에 그대로 남아서 살기로 했다.
- 친구하고 같이 살래.
이한이 은서와 같이 살기로 했다는 말에 지원이 대뜸 꺼낸 대답이었다.
- 내가 신혼집에 왜 들어가? 내가 눈치도 없는 줄 알아?
혼자 두고는 못 간다는 이한의 말에 지원은 친구 민규를 이한에게 소개시켜줬다.
- 부모님께 허락받았대. 방세 반반 부담해서 우리 둘이 같이 살래. 대신 신혼집에 자주 놀러 갈게. 그 아파트에 민규네 집도 있으니까. 민규 집에 갈 때 나도 형네 놀러갈게. 그럼 되지?
지원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이한도 결국 그 말대로 하기로 했다.
결국 이한이 나가는 자리에 민규가 들어오는 것으로 결정되고 이제 주말만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알바가 없는 이 여유로운 시간에 그동안 고마웠던 이들을 찾아다니며 그녀와 같이 살게 된 것을 알리는 중이었다.
정식으로 결혼한 것은 아니지만 좋은 사람과 살게 되었다고 알리는 것이 예의라고 그녀가 떠밀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체육관 식구들에게 먼저 알려준 다음 서진의 카페로 온 이한이었다.
“정말 다시 시작할 마음 없어?”
체육관 식구들도 똑같은 것을 물어봤었다.
“나이가 많아서 힘들어요.”
“작년까진 했었잖아.”
“버틴 거죠. 무작정 버틴 거죠. 어차피 누군가를 책임질 일도 없었으니까, 나 혼자만 책임지면 되는 거니까 버틴 거죠. 하지만 이제는 버티면 안 되잖아요. 책임질 사람들이 있으니까 혼자 좋자고 버티면 안 되는 거잖아요.”
“그렇긴 하지. 책임질 사람이 있으면… 그렇긴 하지.”
서진이 이한의 손가락을 힐끔 쳐다본다. 왼손 약지에 링 반지가 끼워져 있다.
약혼반지인 것일까? 심플한 디자인이 이 남자가 골랐다고 생각하기는 힘들다. 분명 그 여자가 골랐을 것이다. 이 남자는 센스가 없으니까 말이다.
센스가 없어서 몇 년째 옆에서 보고 있어도 모른다. 처음 본 그 여자도 바로 알아차렸는데 몇 년째 본인만 모른다, 센스가 없으니까.
“혹시, 과자나 빵 만드는 거에 관심 있어?”
서진이 문득 뭔가 생각났는지 이야기를 꺼낸다.
“빵… 이요?”
“내가 아는 분이 제과점을 하시는데 얼마 전에 사람 필요하다는 말을 들었거든. 그때는 아는 사람도 없고 해서 나중에 누구 알게 되면 연락해드린다 했는데, 이한 씨, 거기 가서 일해볼래?”
“하지만 전 자격증도 없고, 만드는 법도 모르고.”
“배워. 지금 필요한 사람은 잔일 할 사람이라고 하니까 가서 잔일 하면서 배워봐. 그분 실력 좋으신 분이야.
아주머니도 좋으시고 사장님도 좋으시고 좋은 분들이니까 이한 씨만 열심히 하면 잘 가르쳐주실 거야.
월급이 세진 않겠지만 학원 수강료 들지 않으니까 셈셈이다 치고.
오전 오후 모두 일해야 하지만, 어차피 그 시간에 자격증 학원 가려고 했잖아?
그러니까 차라리 거기서 일하면서 제과제빵사 자격증을 따.”
“하지만 자격증을 따도 전 가게 낼 만한 여력도 없고.”
“나하고 동업하자.”
“네?”
“여기서 이한 씨가 빵 만들고 과자 만들고 내가 커피 내려서 동업하자.”
“.....”
이한이 서진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여기 파리 날리잖아요.’라는 말을 차마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손님도 없는 이 카페가 어떻게 유지되는가 하는 것이다. 서진이 무슨 재벌 아들이 아닌 이상 말이다.
그런데 동업을 하자는 말에 이한이 입을 떨어지지가 않는다.
차라리 쓴 커피나 마시자며 이한이 다시 그 진한 커피를 한 모금 입에 물었다.
혀끝이 찌르르 해지고 있었다. 에스프레소는 아무리 마셔도 익숙해지지 않고, 우서진이라는 이 남자는 아무리 봐도 수수께끼 그 자체였다.
어느 날, 에스프레소의 맛을 느끼기 시작할 무렵이면 이 남자에 대해서도 조금은 알 수 있게 되는 것일까?
이 젊은 나이에 왜 이러고 사는 것인지, 이해할 수 있는 날이 오게 될까?
*
“빵?”
머리를 감고 나온 은서가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돌돌 만 채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의자에 앉은 그녀 앞에 이한이 국수 그릇을 내밀어준다.
이사는 주말에 하기로 했지만 벌써 이틀 째 은서의 집에서 자고 가는 이한이었다.
회사 일이 늦게 끝나는 바람에 아직까지 저녁을 먹지 않았다는 은서를 위해 이한이 국수를 끓여준 것이다.
며칠 사이에 은서가 자신의 집이 조금씩 바뀌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가장 많은 변화가 있는 곳이 바로 주방이었다.
은서 혼자 살 때는 없었던 것들이 채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것들이 바로 음식 재료들. 언제나 집에 먹을 것이 존재하지 않았던 과거에 비해 은서의 주방이 먹을거리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선반을 열면 국수와 밀가루가 있고, 참치캔과 카레 가루도 있다.
냉장고를 열면 몇 년 만에 김치통이라는 게 들어 있게 되었고 놀랍게도 물김치도 있었다.
게다가 진짜 놀라운 것은, 베란다에 놓여있는 작은 박스 두 개. 하나는 감자고 하나는 고구마다.
처음 베란다에 빨래를 널러 나갔던 은서가 발밑의 종이 박스를 보고 뭔지 몰라 발로 차다가 안을 들여다보고 깜짝 놀랐던 것이다.
집에, 먹을 것이 늘어나고 있었다.
이러다가, 이한과 같이 살면 분명히 살이 찌고 말 것이라는 위기감도 있었지만 그것도 잠시, 이 남자라면 자신이 살이 쪄도 여전히 좋아해줄 거라는 믿음이 있기에 늦은 밤에도 그가 만들어주는 음식을 맛있게 먹는 그녀다.
“빵은 좋은데, 그 사장님이 동업하자는 건 좀 그러네요.”
“그렇죠? 가뜩이나 거기도 별로 손님 없는데 나까지 폐 끼치면 좀 그렇죠?”
“.....”
은서가 국수를 우물거리며 이한을 쳐다봤다.
이 남자는 진짜 모르고 있는 것이다. 은서가 왜 그 남자를, 그 카페를 그렇게 달가워하지 않는지 아직도 그 이유를 모르는 것이다.
하지만 은서가 굳이 이 남자에게 그 남자에 대해 말해주지 않는 것은 지금까지 무난하게 이어온 관계를 자신이 어색하게 만들어서 끊어버리기 싫기 때문이다.
어차피 이 남자는 자기 남자고, 게임은 끝났다. 승자의 여유를 보여주자고 은서가 생각했다.
“그런데 그 사장님은 왜 이혼했대요?”
“네?”
은서의 말에 이한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서진이형, 이혼했대요?”
처음 듣는 말에 이한이 놀란 것이다.
“몰랐어요?”
그 말에 은서가 더 놀랐다.
몇 년을 알고 지냈다면서 그 남자가 이혼남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은가? 대체 이 남자는 뭘까?
“아니, 나는 아직 미혼인 줄 알고 있었는데. 그런데 은서 씨는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그거야 그 사장님이 말씀해주셔서.”
자기 입으로 그 남자는 분명히 말했다.
결혼한 적도 있고, 라고. 결혼한 적이 있다는 것은 지금은 결혼한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고, 그렇다면 이혼 아닌가?
“둘이 그런 얘기까지 해요?”
뭔가 이한의 말투에서 질투 비슷한 뉘앙스가 풍겨난다.
자기에게는 말하지 않는 것을 은서에게 말했다는 사실에서, 이한이 살짝 질투 비슷한 걸 느꼈기 때문이다.
‘혹시 그 형이 은서 씨 좋아하는 거 아냐?’
그때 이한이 화장실에 간 사이에 두 사람이 카운터에서 뭔가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던 것을 이한이 떠올렸다.
그리고 그때 은서가 이한에게, 서진이 자신을 째려봤다고 했던 말도 떠올랐다.
어쩌면 째려본 것이 아니라 관심이 있어서 진지하게 봤던 것을 째려본 것으로 오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은서 씨는 예쁘고 세련된 스타일이니까… 그 형이 좋아하는 타입일 수도 있고.’
은서와 서진, 두 사람을 나란히 세워놓고 보니 그림이 또 좋은 것이다.
두 사람이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 순간, 이한이 절대로 동업하지 말자는 생각을 했다.
치졸해 보일지 몰라도 은서와 서진이 만날 핑계를 만들어주지 말자 싶은 것이다.
아, 세상을 다 품어줄 것 같다가도 밴댕이 소갈딱지처럼 치사해질 수도 있는 남자, 그것이 바로 사랑에 빠진 남자가 아니랴.
“국수 맛있다.”
국수를 호로록 호로록 먹던 은서가 빙그레 웃는다.
“조미료 넣었어요?”
“아니요, 육수 냈어요.”
“뭔가 멋지다. 그러지 말고 우리 둘이 국수집 차릴까요? 나 회사 관두고 우리 둘이서 국수집을 차려서.”
“그러다 망하면요?”
“.....”
이한의 간결한 대답에 은서가 할 말을 잃었다. 두 번 생각도 하지 않고 망할 것부터 생각하는 이 남자, 정신개조가 시급했다.
사람이, 잘될 것부터 생각해야지 안 될 것부터 생각하다니, 아무래도 잔소리를 조금 해줘야겠다고 생각하며 은서가 그릇을 들어 국물을 비운다.
*
“오지 마.”
창가에 이마를 기댄 채로 그 남자가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싫어. 그러니까 오지 마.”
영업이 끝났다는 팻말을 걸고 불이 꺼진 카페 안에서 서진이 전화를 하는 중이었다.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 난 이미 그 때 다 끝냈어.”
거기까지 말한 서진이 전화를 끊어버린다. 조금 세게 핸드폰을 내려놓자,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식은 커피가 흔들린다.
주머니를 손으로 더듬던 서진이 쓴 웃음을 짓는다.
“담배 끊었는데.”
끊은 담배를 무의식중에 찾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헛웃음을 흘리며 서진이 식은 커피가 든 잔을 들어 올렸다.
식은 커피가 유난히 쓰게 입안을 맴돌고 있었다.
*
“월급은 많이 주지 못하지만 대신 우린 그날 남은 빵을 다음 날에는 팔지 않으니까, 남은 빵은 가져가도 괜찮아요.”
사람 좋아 보이는 중년의 부인이 이한을 향해 생글 생글 웃으며 말했다. 아르바이트생을 구하게 된 것이 기쁜 표정이었다.
서진이 이한을 데리고 가서 소개해준 제과점은 유명 프랜차이즈가 아닌 개인이 하는 작은 제과점이었다.
처음 가게 안으로 들어섰을 때 이한의 코를 간질인 것은 달콤한 냄새였다.
지독하게 달콤한 냄새에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부터 기분이 좋아진 이한이었다.
그는 단 것을 좋아한다. 설탕을 듬뿍 넣은 단 떡볶이를 좋아하고, 빵은 달고 부드러운 크림이 들어간 슈를 좋아한다.
그리고 커피는 달달함의 극치를 달리는 밀크 커피.
어릴 때부터 단 것을 좋아했지만 복싱을 하면서부터는 단 것을 끊어버렸다.
단 것을 먹으면 체중이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불어났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키가 크기 때문에 남들보다 더 마르지 않으면 곤란했다. 그렇다고 헤비급으로 체급을 상향 조정할 수도 없었다.
남들보다 머리 하나 반이 더 큰 키로 체급을 유지하려면 남들보다 더 적게 먹고, 더 체중을 빼야 했던 시간들,
그래서 가장 좋아하는 단 것들을 먹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제과점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마치 천국에 온 듯한 기분을 느껴버린 것이다.
“우리 바깥양반이 안에서 빵을 만드니까 이한 군은 주로 진열하고 포장하고, 판매하는 일을 해주면 돼요. 전에 편의점에서 일했다고 들었는데 그것과 비슷해요. 계산대는 어디나 비슷하니까요.”
“네.”
“손님이 없을 때는 안쪽에서 바깥양반에게 차근차근 배우면 돼요. 전에 빵을 만들어 봤어요?”
“아니요.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시간은 조금 걸리겠지만 젊으니까 빨리 배울 수 있을 거예요.”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우리야말로 잘 부탁드려요.”
생글생글 사람 좋게 웃는 여사장과 어색하게 웃는 이한을 두고 서진이 돌아갈 움직임을 보였다.
“그럼, 나는 그만 가볼 테니까 이한 씨, 잘해봐.”
“어, 형. 가시게요?”
“나도 가게 열어야지. 그래 뵈도 손님이 제법 있다고.”
“그럼 제가 저녁에 찾아뵐게요.”
“그래. 케이크나 가져와.”
서진이 여사장에게 인사하고 문을 나간다. 서진이 나가자 여사장이 이한에게 앞치마를 건넸다.
“자, 지금부터 케이크를 밑판에 옮기는 법 가르쳐줄게요. 일단 그것부터 배워요.”
“네? 네.”
케이크를 옮기는 것이 뭐 어렵겠냐는 생각으로 이한이 앞치마를 둘렀다.
*
여사장을 따라 키친으로 들어간 이한이 그곳에서 생크림을 바르고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무뚝뚝한 인상의 중년 남자가 스펀지케이크에 생크림을 정성들여 바르고 있었다.
“인사해요, 우리 남편. 여보, 오늘부터 일하게 될 변이한 군이에요. 왜 있잖아요, 서진이가 소개해준.”
“.....”
여사장의 말에 남자가 대꾸도 하지 않는다. 이한 쪽은 쳐다도 보지 않고 케이크만 만지는 남자를 보며 여사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 양반이 좀 숫기가 없어요. 사람 사귀는데 시간이 좀 걸리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착한 양반이니까 너무 겁먹지는 말아요.”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한이 남자를 향해 허리를 꾸벅 숙였지만 남자는 여전히 이한 쪽은 쳐다보지 않았다.
그런 남자를 무시하고 여사장이 이한을 케이크가 쭉 늘어져 있는 곳으로 데려갔다.
“잘 봐요. 이렇게 스페튜라를 케이크 아래로 넣고 살짝 들어 올려요. 힘 조절을 잘하지 않으면 케이크가 망가지니까 조심해야 해요. 이렇게 들어 올려서 손바닥을 살짝 밀어 넣고, 들어서 민판으로 옮기면 끝.”
여사장이 먼저 시범을 보인다. 보기에는 쉬워 보였다. 대자 같은 기구로 케이크 한쪽을 들어 올리고 손바닥으로 받쳐 옮기면 끝이다.
“해볼래요?”
“네.”
여사장이 건네주는 스페튜라라는 기구를 받은 이한이 케이크 앞에 섰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케이크 아래로 밀어 넣었다.
살짝 힘을 줘서 케이크를 들어 올리고 그 아래로 손바닥을 넣어 케이크를 들어 올린 다음 밑판으로 옮기고, 다시 손을 빼고 스페튜라를 빼낸다.
케이크가 밑판에 안착하는 걸 보고 이한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성공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렇게 하면 되나요?”
뿌듯하게 여사장을 바라보는 이한의 귀에, “망가진 케이크는 저놈 다 먹여.”라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뚝뚝하게 생크림을 바르던 남자가 한마디 툭 던진 것이다.
‘망가진 것? 뭐가 망가졌다는 거지?’
이한이 이해가 가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릴 때 여사장이 웃으며 손가락으로 케이크 한쪽을 가리켰다.
“아.”
순간 이한의 얼굴이 빨개졌다. 케이크 한쪽이 내려앉은 것이다. 아주 살짝 내려앉긴 했지만 이렇게 돼서는 팔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죄, 죄송합니다.”
“처음에는 다 그래요. 몇 번 실패하다 보면 차차 손에 익어서 괜찮아지니까 신경 쓰지 말아요.
원래 하루에도 몇 개씩 망가지고 그러는 거니까.
여기 있는 것들로 옮기는 거 연습해봐요. 이따가 내가 카운터 보는 법 가르쳐줄 테니까 그때까진 이거 하고 있어요.”
망가진 케이크는 신경도 안 쓴다는 듯 여주인이 사람 좋게 웃고 키친을 나가자 무뚝뚝한 남자 파티셰와 이한만 남겨지게 되었다.
이 숨 막히는 공기에 이한의 등으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그리고 그의 앞에, 그가 옮겨주기를 바라는 케이크들이 반짝반짝 빛을 내며 기다리고 있었다.
케이크가 이렇게 무서워지기는 처음인 이한, 용감하게 스페튜라를 손에 들었다. 그리고 케이크를 향해 용감하게 돌진했다.
*
띠링-.
출입문에 달아놓은 풍경이 울리는 소리에 서진이 뒤를 돌아본다. 보통 이런 시간에는 손님이 없는데 문이 열린 것이다.
“어서 오.”
손님을 맞이하려던 서진의 목소리가 거기서 멈췄다. 열린 출입문 앞에 단아한 차림새의 여성이 서 있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곱슬머리에 연한 화장, 그리고 파스텔톤의 세미 정장을 입은 그녀의 모습에 서진의 얼굴이 굳어졌다.
“오지 말라고 했잖아.”
“얘기 좀 해요.”
“할 이야기 없어.”
평소의 상냥함과는 거리가 먼 차가운 목소리로 서진이 매몰차게 대답했다.
“서진 씨.”
“다 끝났고, 난 더 이상 할 이야기 없어. 그러니까 돌아가. 돌아가서 다시는 찾아오지 마.”
“서진 씨, 나는.”
“무슨 염치로 날 찾아와?!”
서진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높아지자 그를 향해 걸어오던 여자가 놀라 걸음을 멈췄다.
“정말 뻔뻔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네가 무슨 염치로 날 찾아와?!”
“서진 씨, 나도 이러면 안 된다고 생각은 했지만, 세나가.”
여자의 입에서 그 이름이 나오자 서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학부모 참관일에 아빠를 모시고 오라고 했대. 세나가 아빠 오실 수 있냐고 물어서… 내가 부탁해보겠다고 했어.”
멈춰 섰던 여자가 서진을 향해 가만히 걸어왔다. 걸어와서, 카운터 앞에 서서 서진을 바라봤다. 여자의 얼굴에 망설임과 불안이 뒤섞여 있었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세나를 위해서 한 번만 와주면 안 될까? 그 애가 아빠를 너무 보고 싶어 해. 부탁이야, 서진 씨.”
카운터에 올려놓은 여자의 오른손 약지에 끼워진 반지는 서진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반지다.
결혼반지. 그와 그녀가 결혼했을 때 그가 그녀의 손에 끼워줬던 반지. 그녀는 아직 그 반지를 끼고 있었다.
그녀의 반지를 잠시 쳐다보던 서진이 낮게 중얼거렸다.
“난 그 애 아빠가 아니야. 친아빠에게 부탁해보지 그래?”
“서진 씨.”
“꺼져. 꼴도 보기 싫으니까.”
차가운 목소리에 여자가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다 돌아섰다. 더 이상 부탁해도 소용이 없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돌아선 여자가 출입문을 열고 나갈 때까지도 서진이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저 여자가 손을 올려두었던 카운터를 노려보고 있던 서진은 출입문이 닫히고 잠시 시간이 흐른 후에야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얼굴이 평소 같지 않게 일그러져 있었다.
“아빠 같은 소리.”
꽉 주먹 쥔 그의 손등으로 새파란 핏줄이 불거졌다. 그때였다.
띠링-.
문이 열린 것이다.
“꺼지라고 했잖아!”
열리는 문을 향해 서진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네?”
하지만 출입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그 여자가 아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던 은서가 뜬금없는 서진의 버럭, 하는 목소리에 놀라 눈을 말똥말똥 굴린다.
‘저 인간이 내가 이한 씨하고 동거한다니까 화가 나서 저러나?’
승자의 여유를 가지고 특별히 이곳을 회사 동료들에게 소개시켜주겠노라 큰마음 먹고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같은 부서 여직원들과 카페로 찾아온 은서, 난데없는 문전박대에 잠시 당황하고 있었다.
“아, 은서 씨.”
당황한 것은 서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여자가 돌아온 줄 알았는데 은서가 들어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게다가 다른 여자들과 함께 말이다.
“오늘, 영업 안 하세요?”
눈을 깜빡거리며 놀란 은서의 말에 서진이 서둘러 카운터 밖으로 나간다.
“아니요, 해요. 죄송해요. 다른 사람과 착각을 해서.”
“다른 사람이요?”
“자꾸 귀찮게 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만.”
“아, 물건 팔러 왔나 보다.”
외판원에게 시달렸나 보다 생각하며 은서가 동료들에게 들어오라 손짓했다.
정오의 티타임에 갑자기 몰려든 네 명의 여자들로 인해 조용하던 카페가 분주해지고 있었다.
분위기가 괜찮다며 꺅꺅거리는 여자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서진이 창밖을 힐끔 쳐다본다. 여자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
“이게 뭡니까?”
은서가 내미는 것을 받아들며 서진이 수상하다는 눈빛을 짓는다. 편지 비슷한데, 연애편지 주고받을 사이가 아닌 것이다, 이 여자와 자신은.
“초대장이요. 꼭 오세요.”
“초대장?”
“집.들.이. 초대장이요.”
은서가 ‘집들이’에 강조점을 찍어 대답했다.
“집들이? 요즘은 동거도 집들이 하나?”
서진이 봉투에서 초대장을 빼내 펼쳐본다. 돌아오는 일요일이었다.
“토요일에 짐 옮기고 그다음 날 바로 집들이 할 거예요. 친구들만 불러서요.”
“결혼 전에 같이 산다는 걸 남들이 아는 거 안 창피해요?”
“그게 뭐가 창피해요?”
“세상 좋아졌네. 전에는 혼전 동거 쉬쉬하면서 비밀로 했는데 이제는 대놓고 집들이까지 하면서 공개도 하고.”
“결혼할 거예요. 결혼할 건데 조금 일찍 같이 사는 게 뭐가 창피해요? 결혼하지 않을 것도 아니고, 잠깐 만났다 헤어질 것도 아닌데. 식만 안 올렸지 마음은 이미 결혼한 건데 뭐가 창피하다는 건지 모르겠네요?”
“사람 일이 마음대로 된데요?”
“네?”
서진의 의도를 몰라 은서가 그를 쳐다본다. 역시 이 남자는 그녀 자신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걸 그녀가 느꼈다
. 이전에는 상상도 못했다. 설마 자신의 사랑 라이벌이 남자가 될 줄은. 이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상황이란 말인가.
“진짜 결혼할 때까지는 모르는 거예요. 결혼했다가도 깨지고, 결혼식 코앞에 두고도 헤어지고 그러는 세상에, 같이 몇 번 자고 동거하는 게 무슨 대수겠어요?”
이 남자, 은근히, 아니 대놓고 속을 긁기 시작한다. 전에도 느낀 것이지만 얄밉게 말하는 것에 일가견이 있는 남자다.
생긴 건 멀쩡해서 시침 뚝 떼고 있으면 친절한 겉모습에 여자들이 깜빡 속겠지만 채은서, 절대로 속지 않는다.
“지금 질투하는 거예요?”
“나 그런 거 안 해요.”
“뭘, 질투하면서.”
“나 쿨한 남자예요. 질투 같은 거 하지 않아요. 난 그냥 사실을 말하는 것일 뿐.”
“쿨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눈에, 얼굴에 쓰였거든요? 부러워서 죽겠다고? 하여간에 웃겨. 자기가 결혼 실패했다고 남들도 다 그럴 줄 아나 본데, 이한 씨하고 나는 잘 살 거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본인이나 잘 챙기세요. 더 늙기 전에 애 딸린 이혼녀라도 찾아보시든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속을 긁는 상대에게는 속을 긁자 싶어 은서가 한번 당해보라는 식으로 쏘아붙인다.
‘뭘 모르나 본데, 나 만만한 여자 아니거든? 어디서 덤비고 있어? 내가 이한 씨한테나 천사지 그쪽한테도 천사인줄 알면 착각이지, 아저씨!’
“지금 뭐라 했어요? 누가 뭘 실패해요? 듣자 하니 말이 좀 심하네요?”
서진의 눈에서 불꽃이 튄다. 카운터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질 수 없다는 듯 서로를 째려본다.
“내가 틀린 말 한 건 아니잖아요? 결혼 실패했잖아요.”
문득, 은서가 불안해진다.
이 남자는 ‘결혼했었고’라고 말했었지 거기에 다른 말은 없었다.
어쩌면 이혼이 아니라 사별을 했을 수도 있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은서가 조금 불안해졌다.
지금 이 남자의 과민 반응이 꼭 그렇게 보였기 때문이다.
‘내가 실수한 거 아냐? 사별이면 어떡하지?’
“은서 씨, 이렇게 말 막하는 거 이한 씨도 알아요?”
“그러는 서진 씨, 싸가지 없는 거 이한 씨가 알고 있어요?”
“하! 진짜 웃기는 여자네?”
“그쪽은 웃기지도 않는 게이고 말이에요.”
이쯤 되면 용호상박. 이소룡이 울고 갈 내공의 소유자들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만약 은서의 직장 동료들이 그만 돌아가자고 부르지 않았으면 둘 중 하나가 나가떨어질 때까지 이 신경전이 계속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꼭 오세요, 집들이에. 난 게이에게 편견 같은 건 없으니까 자연스럽게 대해줄게요. 물론 이한 씨에게 그쪽 비밀도 지켜줄게요. 난 싸가지가 없지 않으니까.”
최후로 한 방 먹인 은서가 얼른 자리를 피한다.
집들이에 오면 최고로 달달한 모습으로 염장을 질러주리라 결심하며 은서가 신나게 가게를 나가자 남겨진 서진이 기가 막힌다는 눈으로 닫히는 문을 쳐다봤다.
“뭐, 저런 게 다 있어?”
완전히 어이 상실한 표정으로 서진이 헛웃음을 친다.
“누가 뭘 어쨌다고? 결혼 실패? 게이? 웃기고 있네. 오늘 무슨 날 잡은 것도 아니고… 재수가 없어도.”
그쯤에서 서진이 뭔가를 골똘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점점 머릿속에서 사악한(?) 생각이 떠오르며 서진이 이내 음흉하게 웃기 시작한다.
은서에게 복수(?)할 방법이 떠오른 것이다.
“어디 오늘 독수공방 해봐라. 내가 누군지 모르는 모양인데? 나 대학 때 연극부였거든, 이 여자야?”
은서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상상을 하며 서진이 허리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아마 남들이 봤으면 미쳤다고 했을 것이다.
다 큰 남자가 혼자서 씩씩거리다가, 혼자서 화냈다가, 또 혼자서 웃는 모습이 미치지 않고서야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
“네, 네. 좋았어요. 가게 굉장히 예쁘고요 케이크와 빵도 엄청 맛있어요. 그럼요. 남은 걸 가져가도 된다고 하셔서 가지고 가는 중이니까 다른 거 먹지 말고 기다려요. 알았죠?”
시원한 저녁 바람을 맞으며 이한이 한 손에는 두 개의 종이 가방을, 그리고 한 손에는 핸드폰을 들고 걷고 있었다.
“실수도 많았는데 괜찮다고 해주시니까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사장님 빵 만드시는 것 보니까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는 생각도 들고, 잘 선택한 거 같아요. 시간은 조금 걸리겠지만 열심히 해보려고 해요.”
조금 전에 퇴근했다는 은서와 통화 중인 이한이었다.
그의 손에 들린 종이 가방 두 개 중 하나는 은서를 위한 것이고, 하나는 서진을 위한 것이다.
서진이 돌아가기 전에 가게에 들러 케이크를 갖다 달라 했기 때문이다.
아마 오늘 이한이 케이크 몇 개를 망가뜨릴 걸 미리 예상했던 것 같았다.
“네?”
수화기 너머에서 들리는 은서의 목소리에 이한의 얼굴이 빨개진다.
“그, 그런 건 좀.”
은서가 무슨 말을 했길래 이 남자의 얼굴이 이렇게 붉어지는 것일까?
“조금 있다 봐요.”
이한이 얼굴이 붉어진 채로 전화를 끊었다.
- 씻지 않고 기다릴게요. 같이 씻어요.
조금 전에 은서가 전화로 한 말이 이한의 귓가를 떠나지 않는다. 지난번 모텔에서 실패한 후로 은서의 집에서 한 차례 다시 재 시도를 한 적이 있었다. 물론 은서의 집에는 욕조가 없다. 욕조가 없는 대신 샤워기의 물을 틀어놓은 채로 그 물줄기 아래에서 그걸 한 것이다.
부글부글도 없었고, 반짝이는 대리석 욕조도 없었지만 쏟아지는 물줄기 아래에서 하나가 되는 경험은 충격적이었다.
그런데 같이 씻자는 말은 오늘도 그렇게 해달라는 뜻. 상상만 해도 아찔한 느낌에 이한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걸음이 빨라지고 있었다.
*
“형, 저 왔어요.”
이한이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런데 카페 안이 조용하다. 분명히 문은 열려 있는데 아무도 없는 것처럼 조용했다.
“형? 안 계셔요?”
카운터 쪽으로 걸어간 이한이 들고 있던 종이 가방 중 하나를 카운터에 올려놓았다.
그 안에 오늘 이한이 망가뜨린 케이크 하나와 제과점 여사장이 서진에게 갖다 주라며 싸준 카스텔라가 들어 있었다.
“이상하네? 어디 가셨지?”
이한이 시계를 쳐다봤다. 여기서 더 늦어지면 곤란했다. 집에서 은서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메시지 남기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이한이 돌아서려고 할 때.
“이한 씨…?”
파티션으로 가려진 공간 너머에서 서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힘없고 늘어진 목소리였다.
“형?”
왜 이렇게 목소리에 기운이 없을까 생각하며 이한이 파티션 뒤로 걸어갔다.
파티션 뒤는 서진이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간단한 간이침대 하나와 슬림한 서랍장, 그리고 자질구레한 개인 물품이 올려져 있는 선반이 있는 두 평 남짓한 공간의 간이침대 위에 서진이 누워 있었다.
“형, 어디 아파요?”
딱 보니 환자 포스다. 열이 있는지 얼굴도 약간 붉었고, 무엇보다 눈빛이 흐려져 있고 목소리가 기운이 하나도 없는 것이 틀림없이 병이 났다고 이한이 생각했다.
“많이 아프면 병원 가요, 형. 내가 병원까지 태워다 줄게요.”
“그 정도는 아니고… 그냥 몸살인 것 같은데.”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서진이 대답했다.
“그러니까 병원 가요. 밤새 이러고 혼자 있다가 무슨 일 나면 어떡해요?”
“병원은 싫고… 그냥 이한 씨가 좀 있어주면 안 되나?”
“네?”
“아프니까 왠지 혼자는 그러네. 나도 나이가 드는 건지.”
넘어오지 않을 리가 없다. 이 바보 같은 남자는 마음이 약해 빠져서 아픈 사람을 혼자 두고 절대로 돌아가지 못한다.
서진이 들키지 않게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냥 병원 가요, 형.”
“여기 있기 곤란해? 그러면 그냥 가. 난 괜찮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