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맛-9
남자의 맛-9
할 때마다 임신하지는 않을 거라고 이한이 자기 암시를 걸기 시작한다. 그래도 망설여진다.
‘그냥 손으로만 할까? 은서 씨도 지금 충분히 좋아하고.’
결국 타협으로 간다. 하지만 애써 타협하려는 이한의 다리 사이에 이미 일어선 그의 분신이 타협이 어디 있냐고 데모를 일으키기 직전이다.
머리는 ‘방법이 없다, 이대로 가자’고 주장하지만 다리 사이는 ‘하늘이 무너져도 그럴 수는 없다’고 버티고 있다고나 할까.
그런데 또 생각해보니 웃긴다. 욕실에서 거품 범벅이 된 채로 밖에 나가 콘돔을 가져와 다시 그걸 끼고 한다는 게 머릿속으로 그림만 그려도 우스운 것이다.
그때였다. 은서의 젖혀진 고개 너머로 넘실거리는 핑크색 물이 이한의 눈에 들어왔다.
핑크색 물.
- 부글부글, 알죠?
문득 태경의 목소리가 이한의 귀를 스쳤다. 그리고 이 위기를 타개할 방법이 생각했다.
“하아… 하아.”
이한의 손가락이 다리 사이에서 빠져나오자 은서가 숨을 헐떡이며 그를 올려다봤다.
그녀의 게슴츠레 반쯤 열린 눈이 왜 멈추느냐는 듯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일단 거품 씻고 저기 들어가야죠.”
이한이 핑크색 물이 출렁거리는 욕조를 가리킨다. 아직 열기가 남아 있는 은서의 눈동자에 핑크색이 물들어갔다.
“거품 씻고.”
이한이 바닥에 버려졌던 샤워기를 들어 은서의 몸에 묻어있는 거품을 씻어준다.
말끔하게 거품이 씻겨 나가자 이한이 그녀를 번쩍 안아들었다.
“앗.”
이한의 두 팔에 몸이 번쩍 들리자 은서가 그의 목에 팔을 건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은서를 두 팔 안에 가볍게 안은 이한이 욕조 안으로 발을 들여 놓았다. 따뜻한 물이 다리에 찰랑거리며 감겨들었다.
“으응.”
이한이 욕조 안에 은서를 내려놓자 가슴까지 찰랑거리며 물에 잠긴 은서가 옆에 앉지 않고 다시 욕조 밖으로 나가는 이한을 이상하다는 눈으로 쳐다봤다.
“어디 가요?”
“마실 거 가지고 올게요.”
“아.”
그제야 은서의 얼굴이 붉어진다. 영화에서 보면 욕조 안에서 두 남녀가 붉은색 와인이 담긴 잔으로 건배하던 장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방 한쪽 구석에 냉장고가 있는 걸 들어오면서 봤다.
그 안에 분명 마실 것이 들어 있을 것이다. 물론 와인 같은 건 없겠지만 그래도 로맨틱은 로맨틱.
*
욕실을 나온 이한이 냉장고 문을 열었다. 마실 것을 가져가겠다는 핑계로 일단 나오는 것에는 성공했다.
냉장고 안에는 캔 식혜 두 개와 생수, 그리고 작은 병맥주 두 개가 들어 있다.
잠시 고민하던 이한이 병맥주 두 개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병마개를 따고 선반 위에 올려놓고 침대 위에 벗어둔 주머니를 뒤진다.
‘됐어.’
콘돔을 손에 든 이한이 두 개의 병맥주와 벗은 자신의 몸, 그리고 콘돔을 번갈아 보다가 콘돔 포장을 찢는다.
그리고 재빨리 콘돔을 뒤집어쓴다. 콘돔을 욕실에 들고 들어가는 것보다 이게 더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게 콘돔을 낀 이한이 병맥주 두 개를 들고 다시 욕실로 들어가고 있었다.
오, 이한 씨. 생각 잘못하셨어요, 물속에서 콘돔이라니요. 발상은 좋았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은 법.
*
“아아앙.”
뜨거운 수증기로 가득 찬 욕실 안에서 혜주가 다리를 벌린 채로 태경의 페니스를 향해 내려앉았다.
마주본 상태에서 그의 위로 내려앉은 그녀의 엉덩이를 태경의 손이 붙잡았다.
맑은 물이 출렁거리며 물에 젖은 혜주의 가슴이 흔들렸다.
방수 윤활제를 바른 태경의 물건이 혜주의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욕조에서의 원활한 섹스를 위한 필수품 방수 윤활제. 이미 수차례의 시행착오 끝에 욕조 섹스의 달인이 되어가고 있는 태경과 혜주였다.
이렇게 되기까지 욕조에서 얼마나 많이 벌러덩 미끄러지며 쇼를 해야 했으며, 또 얼마나 자주 질염을 앓아야 했던가.
오죽 했으면 혜주가 ‘태경 씨 의사 맞아?!’라고 소리까지 질렀던 것이다.
하지만 욕조 섹스의 환상을 결코 버릴 수 없었던 이 두 남녀는 결국 방법을 찾아내고야 말았으니 그게 바로 방수 윤활제와 페미돔.
이 두 가지 인류 문명의 발명품으로 인해 이 두 남녀가 지금도 욕조 안에서 열심히 뜨거운 사랑을 나누는 중이다.
처음 멋모르고 욕조에서 처음 시도했을 때 물이라서 잘 되겠지 했던 환상이 깨지던 순간을 태경은 아직도 기억했다.
뻑뻑한 나머지 들어가지 않아서 그도, 그녀도 고통스러웠던 그 첫 번째의 기억을 말이다.
물속이라 부드럽게 삽입될 것이라 생각하면 큰 오산.
오히려 물이 천연 윤활제를 몽땅 씻어버린 탓에 물기 하나 없는 뻑뻑한 상태로 삽입해야 되는 지경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지금은 방수 윤활제로 무장하고 페미돔으로 원천 차단까지 시킨 것이다.
이제는 물속에서의 그 몽환적 분위기를 마음껏 즐기는 일만 남았을 뿐.
“스타트.”
태경이 손으로 옆의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두 사람의 몸 아래에서 부글부글 물방울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욕조의 벽면과 바닥에서 일어나는 물방울의 일렁거림을 온몸으로 받으며 태경이 허리를 천천히 움직이자 그 위에서 혜주의 몸이 흔들린다.
태경의 손가락이 버튼을 한 번 더 누르자 물속에서 붉은 조명이 물방울과 함께 번져나간다.
“아아앙.”
허벅지와 옆구리에 물방울의 마사지를 받으며 붉은 몽환적 조명 안에 몸을 담근 혜주가 허리를 앞뒤로 움직이며 숨을 헐떡였다.
그런 그녀를 위해 태경이 다시 한 번 버튼을 누르자 부글부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세찬 물방울이 위로 솟구친다.
붉은 조명, 부글거리는 청각적 효과, 그리고 물방울 마사지의 간지러운 자극, 적당히 미지근한 온수의 부드럽게 젖은 느낌.
이 모든 것이 하나로 어우러져 욕조가 천국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설마, 하는 법은 알겠지?’
태경이 문득 이한을 떠올렸지만 크게 신경 쓰지는 않는다. 설마 기본도 모르진 않겠지,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욕조에 입욕제를 풀지 않는다는 그런 기본.
물은 뜨겁게 하지 않는다는 그런 기본. 반드시 방수 윤활제를 사용해야 한다는 기본 중의 기본.
그리고 격렬하게 할 수 없으니 슬로우 슬로우하게 하기는 진짜 기본.
‘알고 있을 거야, 한두 번 해봤겠어?’
그런 몸 좋은 남자와 잘 빠진 여자가 사귈 때면 이런 모텔은 수도 없이 들락거렸을 것이라고 태경이 생각했다.
그러면 당연히 알 건 다 알 것이라고. 절대 모를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
“짠.”
은서가 제법 귀엽게 소리를 냈다. 두 사람의 손에 들린 맥주병이 맑은 소리를 내며 부딪친다.
욕조 안에 몸을 담근 두 사람이 병맥주로 건배를 하는 중이었다.
두 사람이 몸을 담근 욕조 안에는 일명 러브밤이라는 입욕제가 풀어져서 핑크빛 물색과 거품을 내고 있었다.
수온은 뜨끈뜨끈했고 두 사람의 몸이 한껏 풀어지고 있었다.
“이거 누르면.”
은서가 욕조 옆의 버튼을 가볍게 누르자 두 사람의 옆과 아래에서 거품이 일어난다.
“와!”
이한이 감탄해버렸다.
욕조가 물살을 일으키며 녹아 있던 입욕제가 무수한 거품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말로만 듣던 거품 목욕인 것이다.
뺨과 입술, 그리고 몸 전체에 거품이 묻어나며 두 사람이 맥주를 마셨다.
맥주를 마시는 은서의 뺨이 붉게 상기되어 있는 것을 보며 이한이 기회는 이때라고 생각했다. 지금이 바로 그때인 것이다.
그녀에게 다가가려다 이한이 멈칫거린다. 손에 들린 맥주병을 어디에 치워야 할지 몰라서였다.
자칫 잘못했다 떨어지면 욕실 바닥이 유리조각 천지가 돼버릴 것이다.
안 되겠다 싶어 이한이 맥주병을 물에 띄웠다.
좋은 생각이었다. 그의 손을 떠난 맥주병이 물에 둥둥 떠다니는 사이에 이한이 몸을 일으켜 그녀의 앞에 꿇어앉았다.
“아.”
맥주병을 손에 든 채로 은서가 얼굴을 붉히며 이한을 바라본다. 물에 젖은 남자가 그녀를 뜨거운 눈동자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이미 조금 전에 충분히 뜨거워졌었던 그녀의 몸이 다시 달아오른다.
가뜩이나 뜨거운 물에 흐물흐물 녹아진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은서가 살며시 무릎을 세우며 다리를 벌렸다.
거품투성이라서 물 안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그녀의 다리를 잡고 그녀의 안으로 천천히 허리를 밀려던 이한이 뭔가 이상한 것을 느낀 것은 그때였다.
‘응?’
슬쩍 손으로 아래를 만져보자,
‘헉!’
물건에서 콘돔이 반쯤 벗겨져 있었다. 콘돔 안으로 물이 들어가며 흘러내린 것이다.
‘안 돼.’
당황한 이한이 서둘러 손으로 콘돔을 밀어 올리려 했지만 이미 안에 물이 들어간 콘돔이 잘 끼워지지 않는다.
그렇다 이 남자. 물속에서는 콘돔 안으로 물이 들어가 버려 쉽게 벗겨진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어쩔 수 없어.’
이렇게 된 이상 콘돔 없이 가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이한이 과감하게 콘돔을 포기하고 그녀의 허벅지를 벌린다.
“으응...”
이미 은서는 잔뜩 기대어린 눈으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더 이상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윽.”
짧은 신음과 함께 이한이 은서의 안으로 물건을 밀어 넣었다.
허리를 쑤욱 밀며 젖은 물건이 그녀의 안으로 미끄럽게 들어갔… 어야 하는데.
“아파…!”
그녀가 미간을 찡그리며 소리를 내는 바람에 이한이 허리를 멈췄다.
“아, 아파요?”
한 번도 섹스를 하며 아프다고 말한 적이 없던 은서였다. 그런데 삽입도 하기 전에 아프다고 미간을 찡그린 것이다.
유난히 그녀의 질이 뻑뻑하다는 건 이한도 지금 막 느꼈다. 잘 들어가지 않는 것이다.
분명히 물속인데, 물속에서는 더 잘 들어가야 하는 거 아닌가?
물이 부드러우니까, 물 안에서는 저항도 없이 미끄러져 들어가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데 왜 안 들어가지?
물에 천연 윤활제가 씻겨나가서 그녀의 안으로 쉽게 들어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는 순진한 이한 씨,
다시 한 번 삽입을 시도했지만 아프다고 소리를 지르며 두 손으로 밀어내는 은서 덕분에 뒤로 나앉고 말았다.
“응?”
얼굴에 거품을 묻힌 채로 이한이 눈만 껌뻑거렸다.
*
“.....”
도대체 천정에 저 거울은 왜 달려 있는 것일까? 하고 은서가 생각했다.
하트무늬 예쁜 침대 위에 누워 하얀 이불을 가슴까지 폭 올려 덮은 채로 은서가 천정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쳐다봤다.
젖은 머리카락을 베개 뒤로 넘긴 채 어깨만 드러난 자신의 모습이 그녀의 눈 안에 가득 들어왔다.
“.....”
열려 있는 욕실 문 쪽으로 은서가 힐끗 시선을 돌린다. 아직 이한이 나오지 않고 있었다.
뒷정리를 하고 나오겠다며 은서를 먼저 내보낸 이한이 아직 나오지 않는 것이다.
‘으응.’
은서도 난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욕조 안에서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나버린 것이다.
설마하니 안 될 줄은 몰랐다.
참고 하면 안 될 것도 없겠지만 그렇게 하는 것은 서로에게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물속에서의 접촉은 생각보다 좋지 않았다. 로맨틱은 딱 거기까지였다.
은서는 괜찮았다. 무드에 대한 환상이 조금 깨어지긴 했지만 괜찮았다.
하지만 지금 욕실에서 나오지 않고 있는 남자는 조금 충격이 큰 것 같았다.
그래서 뒷정리를 한다는 핑계를 대고 쉽게 나오지 않고 있는 것이다.
‘괜찮은데.’
뭔가 이한이 상당히 노력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실은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 것이다.
이런 것에 신경을 썼다면 애당초 이한과 사귀지도 않았을 것이다.
로맨틱이나 이벤트가 기분 좋긴 하지만 굳이 없어도 상관은 없는 그녀였지만 남자의 마음은 또 다른 것일까?
남자는 뭔가를 여자에게 해주어야만 안심이 되는 것일까?
평소와는 다른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조바심이 있었던 것일까?
사실 어디라도 상관없었다. 처음 와보는 모텔에 두근거리긴 했지만, 장소는 특별히 상관없었다.
그의 낡은 차 안이어도 괜찮고, 그녀의 집도 괜찮았다.
옆에 있는 것이 그 남자라는 사실만으로 이미 모든 것이 다 갖추어졌는데, 남자들은 그걸 모르는 것일까?
여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드도 아니고, 로맨틱도 아니고, 이벤트나 선물도 아닌 남자, 자신이라는 것을.
‘그냥 아침까지 끌어안고 폭 잠들었으면 좋겠다. 도중에 깨지 않고 아침까지 계속 같이 자다가, 아침에 함께 눈 뜨면 좋겠다.’
은서가 진짜 바라는 것은 그것이었다. 그래서 오늘 이한이 알바를 쉰다고 했을 때 그렇게 기뻤던 것이다.
다른 것들도 전부 좋았지만 가장 좋은 것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그와 아침까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아침까지 있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의 하루가 온전히 그녀의 것이 된다는 것. 이것보다 더 완벽한 이벤트가 또 어디 있을까.
*
“.....”
욕조에 걸쳐 앉아 있는 이 남자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뭔가 창피했다. 잘해보려고 했는데 하나도 제대로 된 것이 없어서 창피했다.
역시 어울리지 않는 것을 해보려고 한 것이 잘못이었을까? 평소에 하지 않던 것을 흉내 내려 한 것이 잘못이었을까?
멋진 남자로 보이고 싶었다. 은서에게 정말 멋있는 남자로 보이고 싶었다.
그래서 평소에 입지 않던 옷을 지원이 골라줄 때도 군소리 없이 입었고, 사실 그 바지는 너무 꽉 조여서 하루 종일 숨 쉬기도 힘들었었다.
태경이 이곳을 예약한 것을 내주겠다고 했을 때 거절하지 않은 것도, 어쩌면 이런 곳에서 은서에게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아직 은서에게 제대로 된 선물도 준 적이 없다.
처음 사귀기로 했을 때 길거리 노점에서 싸구려 귀걸이를 하나 사서 선물로 주었지만 그녀는 지금까지 한 번도 그걸 귀에 하지 않았다.
어쩌면 귀에 할 수 없을 만큼 조잡한 것이라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받으면서 기뻐했지만 실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자신은 그녀에게 무엇 하나 줄 수 있는 게 없다.
그래서 태경이 준 이것으로 그녀에게 색다른 기쁨을 줄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게 잘못이었을까? 남의 흉내를 내려 한 것이, 자기 것이 아닌 것을 가지고 생색을 내려 한 것이 잘못이었을까.
삽입조차 하지 못했다. 그녀는 들 뜬 눈동자로 기다리고 있었는데 자신은 삽입조차 하지 못했다. 도리어 그녀를 아프게 만들었다.
서툰 남자. 서툴다는 것이 이렇게 싫은 적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벌써 한 달이 넘었는데 아직도 서툰 남자로 있기는 싫었다.
초조함. 어쩌면 초조함이 불러들인 성급함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연상이다. 자신이 더 어리다. 그녀는 어른이고 자신은 그녀보다 어리다. 하지만 마음은, 그녀가 자신에게 기대어주면 좋겠다는 것이다.
기댈 수 있는 남자가 되고 싶다. 듬직한 남자가. 모든 면에서 듬직한 남자가.
태경은 듬직해보였다. 그 남자는 정말 어른처럼 보였다. 말하는 것에서부터 여유가 묻어나는 행동까지, 문득 부럽다고 생각했었다.
한숨을 무겁게 내 쉰 이한이 거품이 묻은 맥주병을 손에 들고 욕실 밖으로 걸어 나갔다.
*
“신경 쓰지 말아요.”
천정의 거울에 비치는 자기 모습을 쳐다보며 은서가 작게 말했다.
그녀의 옆에 이한이 나란히 누워서 마찬가지로 천정 거울에 비치는 모습을 올려다보는 중이었다.
침대에 나란히 누운 두 명이 거울에 비친 자신들의 모습을 계속 올려다보는 중이었다.
이불 안에서 은서의 손이 이한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따뜻한 손이 잡아오자 이한이 미안한 목소리로 입을 연다.
“이런 데까지 왔는데… 미안해요.”
“난 좋아요. 진짜로 좋아요.”
“.....”
“저기, 계속 안할 거예요?”
이한의 손을 잡은 채로 은서가 살며시 물어본다. 이 남자의 기운을 북돋아 주기 위해서는 그녀가 나서는 수밖에 없다.
“진짜는 침대잖아요. 나 기다리고 있는데.”
“…없어요.”
“네?”
뭐가 없다는 건지 은서가 잘 듣지 못했다.
“뭐가 없어요?”
“콘돔이 없어요.”
욕실에서 쓴 것이 전부였던 것이다. 딱 하나 바지 주머니에 챙겨온 것. 물이 들어가 버린 것.
“아.”
은서가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미안해요.”
이한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거듭 미안하다고 말한다. 모텔이 처음인 이 두 사람, 너무 긴장해서 자세히 살펴보지도 않았던 것이다.
모텔의 방에는 늘 콘돔이 두 개는 준비되어 있다는 것을. 모자라면 로비에 자판기도 있다는 것도 모를 것이다.
꿈에도 모를 것이다. 꿈에도 모르니, 이런 말을 하는 것이리라.
“그냥 해요.”
은서가 용기를 낸 것이다.
“네?”
이번에 놀란 것은 이한이었다. 그런 그의 손을 꼭 잡으며 은서가 다시 대답한다. 이미 결심이 섰다는 듯이.
“직접 해도 돼요. 콘돔 없이.”
*
- 오늘 집에 못 돌아가. 저녁 밥 잘 챙겨먹고 문단속 잘하고 자.
“.....”
몇 시간 전에 온 메시지를 확인하며 지원이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노래 소리에 묻혀 메시지가 온 것도 몰랐던 것이다.
“오늘 우리 형 집에 안 들어온대.”
“그래? 그럼 나 너희 집에서 자고 가도 돼?”
민규가 얼른 물어왔다. 길거리 공연을 마치고 단골 분식점에서 막 라면을 먹고 나오는 두 사람이었다.
“자고 갈래?”
“응.”
“그럼 그렇게 해.”
“그럼 밤에 먹을 거 사가지고 가자.”
“집에 형이 만들어놓은 거 있을 거야. 그거 먹으면서 영화나 보자.”
“무슨 영화? 야한 영화?”
보호자가 없는 집에서 친구 둘이 밤새 영화를 본다는 건 당연한 한 장르의 영화밖에는 없다고 생각하며 민규가 엉큼하게 웃는다.
그런 민규를 지원이 한심하다는 듯 쳐다봤다.
“다큐멘터리.”
“.....”
“농담이고, 좀비 영화 보자.”
“좋다, 좀비. 미드 시리즈 오늘 밤 안에 완파하는 거야?”
“먼저 골아떨어지는 놈이 내일 아침밥 하고 설거지하기.”
“오케이.”
신이 나서 걷던 민규가 집에 ‘오늘 지원이네서 자고 갈게요.’라는 전화를 마친 다음 싱글벙글하며 말했다.
“나도 너처럼 자취했으면 좋겠다.”
“집이 서울인 놈이 무슨. 그냥 엄마 해주시는 밥 먹고 다녀.”
“너하고 나하고 자취하면 재미있을 텐데, 그렇지? 아침에 같이 학교 갔다가 오후에 집에 오면 밤까지 연습하고, 새벽까지 미드 보다가 아침에 학교 가고. 재밌지 않겠냐?”
“그러다나 계절 학기 듣고 싶지?”
“.....”
“쌍권총 맞고 남들 다 노는 여름 방학에 땀 흘리며 계절 학기 듣고 싶지 않으면 미드는 주말에나 몰아보고 평일에는 공부해, 학생.”
대답은 그렇게 퉁명스럽게 했지만 민규의 말을 들으며 지원이 그것도 괜찮겠다 싶었다. 듣고 보니 좀 괜찮은 제안인 것이다.
‘어차피 은서 누나도 혼자 살면 좀 그렇고. 이참에 형이랑 은서 누나랑 같이 살면 좋을 텐데. 누나 집에서 뭐라 그러려나?
하지만 둘 다 나이도 있고 하니까 어차피 결혼할 거 아냐.
어차피 결혼할 거면 동거 좀 하다가 결혼해도 되지 않나? 형을 은서 누나네 집으로 보내버리고 나는 민규 이 녀석하고 자취하고.
방세는 반반 부담하고, 생활비도 반반 부담하고. 다음 달에 과외 하나 더 늘이면 돈이 쪼들리지도 않을 거고.’
생각이 들자마자 지원이 열심히 머릿속으로 계산을 해본다. 아무리 계산하고 또 계산해도 이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
‘형이나 누나나 먼저 동거하자고 말 꺼낼 사람들도 아니니까 내가 한번 말 꺼내볼까?
일단 핑계는 누나를 염려해서라고 하고. 몇 달만이라고 조건 붙인 다음 일단 같이 살게 해서, 일단 몇 달만 같이 살다보면 그대로 쭉, 평생 같이 사는 거지, 뭐.’
머리가 비상하게 잘 도는 지원, 설계도가 머릿속에서 착착 그려지고 있는 중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민규만 옆에서 ‘나도 자유가 필요해’라고 구시렁거릴 뿐이었다.
*
“으응.”
은서의 입술 안에서 부드러운 이한의 혀가 그녀의 혀를 감싸고 빨아댔다.
이한의 혀가 그녀의 혀를 휘감을 때마다 은서가 몸을 움찔거리며 신음했다.
이한의 손가락이 은서의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파고들어 그녀의 귓가를 간질인다.
“응, 응.”
은서가 눈을 감았다. 눈을 감고 이한의 혀와 입술을 만끽해본다. 뒤엉킨 혀의 맛이 달콤했다. 너무 달아서 녹아내릴 지경이었다.
이불은 이미 침대 아래로 흘러내려가 있었다. 뜨겁게 키스하는 입술을 떼지 않은 채로 이한의 손이 그녀의 허벅지를 벌렸다.
젖어 있는 계곡 쪽으로 단단하고 뜨거운 것이 다가오고 있었다. 입구를 문지르는 느낌에 은서가 시트를 손으로 움켜잡았다.
“읏.”
이한의 손이 그녀의 몸을 감싸 안으며 두 사람의 아랫배가 맞닿았다. 아랫배가 맞닿으며 동시에 이한의 페니스가 은서의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하읏.”
빈틈도 없이 두 사람의 하체가 이어지며 그녀의 깊은 곳까지 단숨에 이한이 들어와 버린다.
“아앗.”
그녀를 꽉 끌어안은 채로 허리를 흔드는 이한의 움직임에 맞춰 은서의 다리가 허공에서 춤을 춘다.
“앗, 앗… 아…!”
점점 더 깊숙이 찔러 들어오는 느낌에 은서가 허리를 들썩이며 이한을 받아들였다.
“아아… 아앗!”
이한의 페니스에 관통당하며 은서가 숨을 헐떡이며 몸을 젖혔다.
반쯤 뜬 그녀의 눈동자에 천정의 거울이 보였다.
그 거울 안에 그녀와 그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벌거벗은 채로 그의 아래에서 다리를 흔들고 있는 그녀 자신의 모습을 보는 순간 은서의 몸이 화끈 달아올랐다.
비로소 그녀가 저 거울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왜 하필 저기에 거울을 설치해 놓았는지.
이 침대에서 섹스하는 이들이 자신들의 섹스하는 모습을 볼 수 있게 하기 위한 거울인 것이다.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섹스하고 있는지 적나라하게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미끈한 등 근육을 꿈틀거리며 그녀를 끌어안고 있는 이한의 뒷모습이 거울에 비쳤고, 그런 그의 아래에서 뜨겁게 신음하며 두 다리를 흔들고 있는 그녀 자신의 모습도 비쳐졌다.
새하얀 두 개의 알몸이 뒤엉켜 뜨거운 행위를 나고 있는 모습이었다.
은서가 자신이 얼마나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얼굴도 이런 표정을 지을 줄 아는 것이다.
“으응, 응, 응…!”
자신이 저렇게나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정작 그녀를 봐줘야 할 이한은 눈을 질끈 감은 채로 허리를 움직이고 있었다.
“나, 날 좀 봐요. 이한 씨.”
은서가 그의 뼘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헐떡이는 숨소리와 함께 그 말을 내뱉었다.
“날 봐요.”
그때 은서의 눈동자와 이한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누가 누굴 더 빨아들이고 있었던 것일까. 그녀의 눈동자를 보는 순간 그때까지 참고 있던 이한의 하체가 폭발했다.
겨우 참고 있던 이한이었다. 그녀의 안에 분출하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참으며 버티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 폭발해버렸다.
“하읏…!”
순간 당황한 이한이 몸을 뒤로 빼는 순간 은서가 자신의 몸 안에서 번지는 뜨거운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이한이 그녀의 안에 사정해버린 것이다.
첫 번째 질 내 사정이었다.
‘해버렸다.’
그녀의 그의 머릿속에 동시에 그 생각이 찾아들었다. 진짜 해버린 것이다. 자궁 안에 남자의 씨가 퍼진 것이다.
그 증거로 이한의 몸이 빠져나간 자리, 그녀의 다리 사이로 뭔가가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은서가 떨어지려는 이한의 얼굴을 손으로 꽉 잡았다. 그리고 자신을 향하게 한 다음 속삭인다.
“당신하고 같이 살고 싶어요.”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그리고 진짜 받고 싶었던 선물이었다.
자신에게 뭔가 해주기를 원한다면 단 하나, 그것을 주기를 은서가 간절히 바랬다.
그를, 그녀에게 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