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맛-8
남자의 맛-8
- 넌 결정적인 한 방이 없어.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실패할 때마다 들었던 말이었다. 결정적인 한 방.
“그럼 공부하지 말고 차라리 자격증이나 따. 공부보다는 그게 더 쉬워.”
“자격증?”
“제빵사나 그런 거 있잖아, 요리사. 그래, 형 요리 잘하잖아. 그거 따, 요리사 자격증.”
“나 요리 잘해?”
“그럭저럭.”
“내가 해준 밥 맛있었어?”
“.....”
이한의 말에 지원이 입술만 달싹거린다. 시큰둥하니 대답이 없는 지원을 힐끗 쳐다본 이한이 다시 앞을 바라본다. 그리고 조용히 말해본다.
“지원아.”
덜컹거리는 차, 그리고 요란한 엔진 소리.
“이러고 같이 가니까 좋다.”
하지만 그 시끄러운 소음 속에서도 이한의 잔잔한 목소리가 지원의 귀에 꼭 음악 선율처럼 흘러 들어왔다.
세상에서 가장 듣기 좋은, 형의 목소리였다.
*
“자존심이 문젠데.”
은서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한과 지원이 돌아간 후, 현관문을 잠그고 혼자 커피를 마시고 있는 그녀였다.
내일 출근해야 하지만 잠이 오지 않는다.
그런 일을 겪어서 잠이 오지 않는 것이 아니다. 다른 생각 때문에 잠이 오지 않는 것이다.
이한과 지원, 그리고 그녀 자신. 뭔가 이쯤에서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점점 더 그녀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뚜렷하게 알게 된다.
처음에는 그저 함께 밥을 먹을 수 있어서 좋았다.
같이 밥 먹는 사람이 생긴 것만으로도 좋았다.
하지만 그다음으로는 곁에 있어주는 사람이라서 좋았다.
그리고 그녀를 밤에도 혼자 두지 않고, 같이 아침에 눈 떠주는 사람이라서 좋았다.
집이 그녀 혼자만의 공간이라는 느낌을 받지 않게 해주어서 좋았다.
따뜻한 품이라서 좋았다.
그리고 남자라서 좋았다.
여자로 만들어준 남자. 그리고 지금, 그녀가 원하는 것은 더 커져 있다.
진짜 가족이 되고 싶다. 이 집에서, 그와 함께 살며, 그와 가족을 이루고 살고 싶다.
그가 하고 있는 알바를 당장 모두 그만두게 하고 싶다.
돈이라면 그녀에게 있다. 그녀 혼자 벌어도 충분하다.
그녀가 지원이까지 대학에 대학원까지 공부시킬 수 있다.
하지만 그 남자는 그걸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그걸 말하는 순간 그 남자의 자존심이 상처받을 거라는 것 정도는 그녀도 알고 있다.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말이 있고, 절대로 건드려서는 안 되는 부분이 있는 것 정도는 그녀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남자가 준비되기를 기다리는 것은 너무.
“길다. 시간이.”
그녀가 시계를 쳐다봤다. 시간이 열한 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씻지를 못했다.
*
약속 시간은 오후 한 시. 이한과는 약속 장소인 아쿠아리움 앞에서 만나기로 한 은서가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가방에 넣었다.
6월의 중순은 햇살이 눈을 찌를 듯이 따가웠다.
오늘은 제법 신경을 쓴 은서였다. 평소에 입지 않는 셔링 반팔 소매의 블라우스를 입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생각해보라. 나이 스물아홉의 여자가 귀여운 소녀들에게나 어울릴 법한 반팔 셔링, 그것도 약간의 꽃무늬 프린트의 블라우스를 입은 모습을.
게다가 치마도 오늘은 짧다. 작정을 하고 귀엽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한은 스물여섯, 제대로 꾸미지 않으면 누나처럼 보일 수 있다는 위기감이 은서의 마음 한구석에 있었다.
“은서 씨.”
등 뒤에서 이한의 목소리가 들렸다.
“왔어요?”
뒤돌아본 은서의 눈이 동그래진다.
“우와.”
과연 눈앞의 남자가 아는 그 남자인가 싶어 은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감탄을 해버렸다.
평소의 후줄근한 남자는 대체 어디로 가고 이렇게 귀여운 남자가 나타났단 말인가.
오, 하나님 맙소사, 저 바지는 분명 스키니진이렸다?
대체 스키니진이 어울리는 남자가 몇이나 될까. 오늘에서야 은서가 비로소 깨달았다.
이 남자, 다리가 길다는 것을. 키가 큰 것은 알고 있었지만 오늘 깨달은 것이다.
가늘고 긴 다리, 은서의 다리보다 더 길다.
대체 허리 위치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선수 시절 감량 하느라 제대로 먹지도 않았다더니 그래서 군살이 없는 것일까?
요즘 들어 잘 먹여줬는데 살이 하나도 붙지 않은 걸 보면 원래 찌지 않는 체질일 수도 있다.
게다가 감색 반팔 티셔츠는 왜 이렇게 잘 어울리는 걸까? 그리고 이 남자, 머리에 약간 힘도 준 것 같다.
“이거 지원이 작품?”
절대로 이 남자에게서 이런 작품이 나올 리가 없다. 불가능한 것이다.
이 남자는 그저 옷이라면 주는 대로 입고, 머리는 빗질만 하면 되는 남자인데 이렇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공을 들여놓은 것은 틀림없는 지원일 것이다.
“그게 지원이가 그냥 나가면 민폐라고 해서… 이상해요? 보기 많이 이상해요?”
이상했다. 확실히 이상했다. 그래서 은서가 사실대로 말했다.
“응, 이상해요.”
“정말요?”
“엄청 이상해요.”
“어떡하죠? 집에 가서 옷 갈아입고 올 시간도 없는데.”
“됐어요. 이상해도 내가 데리고 돌아다녀 줄 테니까.”
이상했다. 어떻게 이런 남자가 그동안 여자 친구 하나 없이 살았던 것일까? 세상의 모든 여자들이 아마 눈이 삔 모양이다.
아니다. 자신의 눈에 띄게 하려고 하나님이 세상 모든 여자들의 눈을 가려놓은 것이 틀림없다고 은서가 생각했다.
자기에게 오려고, 자기 남자가 되려고 세상 다른 모든 여자들의 눈에는 별 것 아닌 남자로 보였던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다른 여자들의 눈에는 별 볼일 없는 남자로 보여주면 좋을 것이다. 그녀 자신의 눈에만 이렇게 멋진 남자로 보이면 된다.
“저기, 이상하니까 오늘만 이렇게 입고 다음부터는 이러고 다니지 말아요. 알았죠?”
“괜히 지원이 말을 들어서… 아.”
은서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버린 이한의 얼굴에 ‘당황’이 쓰여 있다. 그런 이한의 팔을 은서가 꼭 끌어안았다.
그녀의 가슴이 팔꿈치에 뭉클 와 닿자 이한의 얼굴이 붉어졌다.
하지만 하체가 일어날 여유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스키니진의 위력이니까.
*
“안녕하세요, 은서 씨하고 같은 부서에 있는 강혜주라고 해요. 만나서 반가워요.”
“아, 네. 변이한입니다. 반가워요.”
“은서 씨, 이쪽은 내 남친, 장태경 씨. 태경 씨, 인사해. 내 친구 은서 씨와 은서 씨 남자 친구 변이한 씨.”
혜주의 옆에 서 있던 남자가 은서와 이한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이고 인사한다.
은서도 처음 보는 혜주의 남친이었다. 그동안 혜주에게서 귀가 따갑게 들은 이미지와 조금도 다르지 않아 낯설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딱 혜주의 설명 그대로인 것이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적당한 키에 적당한 몸집. 그리고 얇은 무테안경에 약간 동글동글한 얼굴.
사람은 좋아 보이지만 표정이 그다지 밝아보이지는 않았다.
통성명을 한 후에 네 사람이 향한 곳은 정어리 공연이 있는 수조 앞이었다. 이미 혜주가 오늘의 일정을 쫙 뽑아 온 것이다.
분명히 더블데이트인데 정작 수조 안에서 수만 마리의 정어리들이 아쿠아리스트의 손짓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는 순간 두 여자가 꺅꺅 거리며 앞으로 나가버리는 탓에 결국 남자 두 명만 남겨지게 되었다.
“여자들이란.”
태경이 하품을 한번 한 다음 중얼거렸다. 이한이 보기에도 이 남자는 지금 엄청 피곤해보였다.
표정이 밝아 보이지 않는 것은 분명 피곤하기 때문일 것이다.
“여자들 비위 맞추기 힘들죠?”
태경이 씁쓸하게 웃으며 이한을 쳐다봤다.
“네? 아니, 전 그다지.”
“여자들은 해달라는 게 너무 많아요. 여기 가자, 저기 가자, 이거 갖고 싶다, 저거 갖고 싶다. 그리고 기념일 챙기지 않으면 금방 삐지고. 게다가 무슨 맛집은 그렇게 기가 막히게 아는지 여기에 이게 맛있다더라 하면서. 내가 보기엔 그 맛이 다 그 맛인데. 안 그래요?”
“전 잘 모르겠네요. 은서 씨는 그러지 않아서요.”
“그래요? 운이 좋으시네요. 난 지금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난 분명 연애를 시작했는데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운전기사나 심부름꾼 비슷한 것이 되어 있는 기분이거든요.”
태경과 이한의 눈에 환호성을 지르며 수조 안을 열심히 구경하는 두 여자의 모습이 들어왔다.
“연애라는 건 좀 더 상대방에 대해 알아가는 거 아닌가요? 첫눈에 반해서 사귀기 시작했지만 연애하면서 모르고 있던 상대방에 대해 진지하게 알아가고, 또 좋은 점을 발견하고 단점을 극복하고 그런 게 연애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제 연애는 뭔가 제 생각과는 조금 달라서 혼란스러워요. 이한 씨는 괜찮아요? 연애 할 만해요?”
이 남자는 의사라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어딘가 똑똑해 보이는 말을 한다고 이한이 생각했다.
지원이도 그렇고 이 남자도 그렇고 똑똑한 사람들은 말도 잘하는 것일까?
“전 괜찮아요.”
이한의 대답을 들으며 태경이 이한의 옷차림을 슬쩍 쳐다본다.
“이한 씨 멋있다는 소리 자주 듣죠?”
“네?”
처음 듣는 말이 이한의 눈이 커졌다. 한 번도 멋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만 하더라도 은서가 ‘이상하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은서 씨가 잔소리는 덜 하겠어요. 혜주 씨는 잔소리가 심해요. 내 옷차림이 마음에 안 드나 봐요. 매일 옷이 왜 그러느냐, 이런 게 더 어울린다. 머리는 어디서 했느냐, 혜주 씨가 하라는 대로 하다 보면 내가 내가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니까요.
오늘도 엄청 잔소리 들었어요. 살 빼라고. 배 나왔다고요. 배 나온 게 내 잘못은 아니잖아요? 운동할 시간도 없이 하루 종일 병원에서 일하는데, 이 배를 내가 어떻게 하겠냐고요.”
태경의 말에 그제야 이한이 태경의 배를 힐끗 쳐다봤다. 나오긴 약간 나왔다.
“나도 이한 씨처럼 멋진 몸매 가지고 어울리는 옷 입고 멋지다는 소리 듣고 싶지만 그게 어디 사람 마음대로 되냐고요.”
태경의 넋두리를 들으며 이한이 한 가지 깨달았다. 이 남자는 상당히 성격이 좋다는 것을.
그렇지 않으면 처음 만난 자신에게 이렇게 솔직하게 말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키가 상당히 크네요?”
태경이 이한을 슬쩍 올려다보며 부러운 눈빛을 짓는다.
“이한 씨만 알고 있어요. 실은 이거 키높이 구두예요.”
태경의 눈이 무테안경 너머에서 귀엽게 웃고 있었다.
*
“오, 복싱? 그거 괜찮은데요?”
태경이 이한이 복싱했다는 말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미 여자들은 다른 곳에 가버린 지 오래다.
이게 지금 더블데이트인지 아니면 여자들의 데이트에 남자들이 들러리 선 것인지 알 수가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은서와 혜주는 펭귄과 수달을 보겠노라고 저만치 가고 있었고 서 있는 것에 지친 두 남자는 카페테리아에서 커피를 마시며 여자들을 기다리겠노라고 한 것이다.
태경이 이한보다 일곱 살이나 위였다.
한참 형님뻘인데도 이한에게 말을 놓거나 하지는 않는다. 예의가 있는 사람인 것이다.
아무래도 이한의 몸매가 마음에 든 것인지 어떻게 관리 하느냐고 꼬치꼬치 묻다가 결국에는 운동을 했다는 말에 또 무슨 운동이냐고 집요하게 물은 끝에 이한이 복싱을 했다고 실토해버렸다.
“복싱하면 배 들어가요?”
“들어갈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런데 체력이 저질이라서.”
태경이 커피 한 모금을 쭈욱 마셨다.
“의사라는 게 보기에만 좋지 사람이 할 짓이 못 돼요. 남 살리다가 내가 죽겠다니까요. 병원 안에 갇혀 있다 보면 이게 낮인지 밤인지 구분도 안 되고, 잠을 자는 건지 마는 건지 주말에 좀 쉬려고 하면 데이트라고 불려나오고. 이한 씨는 안 힘들어요? 주말에 못 쉬고 불려 나오는 거?”
“전 괜찮아요.”
“하긴 젊으니까. 나도 스물여섯 살 때는 날고 기었는데. 그때는 정말 물 찬 제비 같았는데.”
태경의 넋두리를 들으며 이한이 약간의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혜주와 이 남자는 사귄 지 몇 달이 지났다고 했다. 거의 일 년 가까이 사귀었다고 했다.
일 년 정도 사귀면 다들 이렇게 되는 것일까?
첫눈에 반해서 서로의 손을 잡았어도 시간이 지나면 이렇게 무덤덤해지고, 또 상대방에 대해서 불만이 나오는 것일까?
만나는 것이 부담스러워지는 날이 자신에게도 올까 싶어서 이한이 조금 걱정이 된다.
자신은 이제 막 시작했지만 이 남자에게도 자신처럼 처음 시작하며 두근거리던 때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두근거림은 어느새 사라지고 부담으로 변해버린 감정으로 관계를 이어갈 수 있는 것일까.
만약, 절대로 그러지 말아야겠지만, 만약 자신에게 이런 때가 찾아오게 되면…
이한이 살짝 고개를 저었다. 처음의 떨림을 잊지 말자, 처음의 그 설렘을 잊지 말자, 처음의 그 두근거리던 심장의 소리를 잊지 말자고 이한이 다짐했다.
“이런 질문 실례지만, 혹시 혜주 씨하고 결혼하실 건가요?”
이한이 먼저 용기를 내서 태경에게 질문했다.
이렇게 시들한 관계인 상태에서 이 남자가 혜주와의 관계를 어떻게 이어갈 것인지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결혼해야죠. 안 그러면 만날 이유가 없잖아요. 내 나이가 벌써 서른셋인데 여기서 결혼 못하면 완전 늦어져요.”
“결혼이 부담스럽다거나 그런 생각은 안 해보셨어요?”
관계를 부담스러워하면서도 결혼은 한다고 말하는 이 남자.
결혼을 해야 해서 결혼을 하겠다는 것일까, 아니면 그녀를 좋아해서 결혼을 하겠다는 것일까.
“어차피 혼자도 부담스러워요. 뭘 선택해도 결과에 자신 없다면 안 하는 것보다는 하는 것이 낫지 않겠어요? 안하고 후회하느니 차라리 하고 후회하기로 했어요. 어차피 인생이 모험의 연속이라면 결혼도 그 까짓 거, 모험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하면 그만이죠. 여자라고 하는 일생일대의 대 괴수의 안으로 제 발로 들어가는 모험이요.”
“풉.”
태경의 말에 이한이 그만 실례인 걸 알면서도 웃어버렸다. 혜주를 가리켜 대 괴수라고 말하는 태경의 과장스런 표정이 너무 우스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혜주 씨, 좋은 여자니까 결혼해도 크게 후회할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이한 씨가 봐도 혜주 씨 미인이잖아요? 저런 미인이 나 같은 키높이 구두나 신는 남자를 만나주는 게 어디예요. 그렇다고 내가 월급이 세길 하나 가진 재산이 있기를 하나, 허울 좋은 의사 딱지 하나뿐인데 그래도 좋다고 만나주니 나야말로 감지덕지죠.”
중얼거리는 태경을 웃음을 멈춘 이한이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러니까 딴 남자에게 눈 돌아가기 전에 뱃살 좀 빼야 하는데… 이놈의 뱃살은 들어갈 생각이 없는 것 같고, 이한 씨 다닌다는 그 체육관 나도 좀 소개시켜줘요. 거기 일반인도 받죠?”
문득, 이한이 창피하다고 생각했다. 부끄러웠다. 이 남자의 말을 들으며 부끄러워졌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괜히 이 남자를 이렇다 저렇다 평가해버린 자신이 부끄러웠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괜히 두근거림이 사라진 부담스런 관계 따위를 생각해버린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두근거림이 사라진 것이 아니다. 설렘이, 좋아하는 마음이 사라진 것이 아니다.
부담만 남은 것이 아니다. 부담만 남아서 의무적으로 결혼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 남자는 그녀를 정말 좋아한다. 좋아해서 피곤하고 힘들고, 자기에게 맞지 않아도 이렇게 이런 자리에도 나와 주는 것이다.
좋아해서 그녀의 잔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좋아해서 그녀를 위해 뱃살을 빼려고 하는 것이다.
무덤덤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워진 것이고, 불만이 아니라 그녀가 원하는 모습이 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일 뿐인 것이다.
이 남자의 혜주에 대한 사랑은 어쩌면 이한 자신이 은서를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을 것이다.
더 깊게 생각하고 더 많이 배려해주고… 더 많이 양보하고.
이런 남자의 사랑을 짧은 자신의 생각으로 무덤덤하다, 부담이다, 저렇게 되지 말자고 했던 자신의 어리석음과 교만이 부끄러워진 이한이 살짝 고개를 내려 애꿎은 커피만 한 모금 마신다.
자신은 이 남자처럼 은서에게 맞춰줄 수 있을까?
이 남자가 혜주에게 하는 것처럼 참아주고, 원하는 대로 다 들어주고, 양보하고, 배려해줄 수 있을까?
사귄 지 일 년이 넘어도 여전히 이 남자처럼 그녀에게 모든 것을 맞춰줄 수 있을까?
여전히 그녀가 자신에게 과분한 여자라고 생각하며 감사할 수 있을까? 일 년이 지나고, 십 년이 지나도…?
“주소 가르쳐 드릴게요. 주말에 저도 체육관 가기로 했으니까 주말에 시간 되시면 전화하세요.”
“정말이요? 이한 씨 전화번호 좀 불러 봐요.”
이 남자와 친해지고 싶다고 이한이 생각했다. 분명 앞으로도 더 많은 것을 보고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 더 많이 보고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여자들이 걸어오고 있었다.
수달 가족 쇼를 보고 근처 숍에서 산 것인지 수달 인형을 하나씩 들고 여자들이 걸어오고 있었다.
태경이 혜주를 향해 손을 흔들자 이한도 은서를 향해 손을 흔들어준다.
“저녁에 어디 예약했어요?”
“네?”
“데이트의 끝은 그거잖아요. 오늘을 위해 자양강장제를 얼마나 많이 먹어뒀는데요. 결정적인 순간에 안 서면 곤란하잖아요.”
“.....”
“내가 혹시나 해서 방 두 개 잡았거든요? 하나 이한 씨네 드릴 테니까 거기 가요. 거기 분위기 완전 죽여줘요.”
“그건.”
“스파 욕조가 2인용이라니까요. 부글부글, 알죠? 느낌이 끝내줘요.”
태경이 눈을 찡긋 거리며 유쾌하게 웃는다. 처음 들어보는 말에 이한이 잠시 얼이 빠져 버렸다.
스파 욕조가 2인용이라서 뭐가 어떻다는 것일까?
욕조는 목욕하는 곳이 아닌가? 그런데 왜 2인용 욕조가 필요한 것이지?
순진한 이한 씨, 신세계를 목전에 두고 있었다. 기대하시라, 개봉박두.
*
“에? 알바 없어요?”
저녁 먹는 자리에서 은서가 놀란 눈으로 이한을 쳐다봤다.
“말해두고 왔어요. 오늘은 좀 빼 달라구요.”
“데이트 때문에?”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아서요.”
이한의 대답에 은서의 눈가에 감격의 빛이 어린다. 자신과의 데이트를 위해 알바까지 모두 미뤄둔 것이다.
그녀의 감격스런 표정을 보며 이한이 새삼 지원에게 감사했다.
- 이런 날은 알바 때려 쳐. 대체 데이트를 뭘로 아는 거야?
더블데이트라며. 그런데 다른 커플은 2차, 3차 가는데 형하고 누나만 일찍 돌아와 봐. 누나 기분이 뭐가 되겠어?
그 정도 눈치도 없어? 그러고 어떻게 연애를 해? 참 신기하다 신기해.
이틀 전부터 지원이 닦달을 한 것이다. 그렇게 연애할 거면 차라리 때려치우라고까지 말한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인 한마디.
- 내가 연애해도 형보다는 잘 하겠다. 내가 은서 누나 인터셉터 해버릴까?
지원의 그 결정적인 한 마디에 정신이 번쩍 든 것이다. 농담이 농담처럼만은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은서 씨, 잘 됐다. 일찍 돌아가야 한다고 해서 걱정했는데.”
옆에서 혜주가 자기 일처럼 기뻐해준다.
“그럼 저녁 먹고 뭐할까요?”
뜻밖의 시간에 은서가 두근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이한을 쳐다봤다.
일찍 데이트가 끝날 줄 알고 이후의 일에 대해서는 아무런 계획도 없었기 때문이다.
“영화 보러 갈까요? 우리 같이 영화 본 적 없잖아요.”
“영화요?”
영화라는 말에 이한이 태경을 힐끗 쳐다본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는 것이다.
이한의 눈빛을 알아차린 태경이 웃음을 참으며 시침을 뚝 떼면서 입을 열었다.
“영화도 좋지만 영화를 직접 찍는 게 더 낫지 않아요?”
“영화를 직접 찍어요? 그런 게 있어요?”
“저기, 우리는 먼저 일어날게요. 같이 움직이지 않는 줄 알고 따로 데이트 코스 예약해놨거든요. 미안해요.”
태경이 양해를 구하며 일어나자 혜주도 같이 일어난다.
“미안, 은서 씨. 이럴 줄 알았으면 은서 씨네도 같이 움직일 수 있게 할걸. 아쉽다.”
“괜찮아, 혜주 씨. 우린 우리끼리 오붓하게 데이트 하면 돼. 오늘 혜주 씨하고 태경 씨 때문에 즐거웠어요.”
“그럼 좋은 시간 보내, 은서 씨.”
“혜주 씨도.”
두 여자가 인사를 하는 사이에 태경이 이한의 주머니에 뭔가를 슬쩍 끼워 넣는다.
“모텔 명함 넣어 뒀어요. 가서 802호실 달라고 해요. 예약할 때 선불로 계산했으니까 그냥 들어가요.”
여자들에게 들리지 않게 귓속말을 이한에게 소곤거린 태경이 혜주와 함께 사라지자 은서와 단 둘이 남은 이한의 귓가에 계속 그 말만 맴돌았다.
‘2인용 스파 욕조’ 그리고. ‘부글부글.’
*
“태경 씨 좋은 사람이었어요, 그렇죠?”
6월의 시원한 밤바람을 맞으며 걸으면서 은서가 이한을 쳐다봤다.
“네? 네. 좋은 분이네요.”
좋은 사람이다. 2인용 스파 욕조가 있는 곳까지 예약해준 좋은 사람이다.
“그런데 우리 어디 가요?”
갈 곳이 있다며 손을 잡고 걷고 있는 이한에게 은서가 기대어린 눈으로 물었다.
이건 그야말로 깜짝 이벤트에 가까운 것이다. 미리 말도 하지 않고 알바를 쉬더니, 이젠 갈 곳이 있다는 것이다.
이 남자에게 데이트 코스를 미리 정해두는 센스도 있구나 싶어 은서가 가슴이 두근거린다.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는 기분이기 때문이었다.
“여긴가…?”
“네?”
이한의 발이 멈추자 은서의 발도 덩달아 멈췄다. 그리고 두 사람의 시선이 한 곳을 향한다.
붉은 색과 핑크 색이 묘한 조화를 이룬 네온 간판에 이탤릭체 글씨로 ‘파라다이스’라고 적혀 있었다.
파라다이스. 모텔 파라다이스.
“.....”
“.....”
두 사람이 잠시 말없이 서 있었다. 은서의 손을 잡고 있는 이한의 손바닥에 땀이 차오른다.
두 사람이 같이 모텔에 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물론 개인적으로도 모텔에 와본 적은 없다.
그때 이한을 처음 만났을 때 윤기수에게 의해 입구까지 강제로 끌려가봤을 뿐, 모텔은 처음인 두 사람이었다.
은서의 집에서, 그리고 이한의 차 안에서 섹스를 많이 했지만 모텔은 낯설고 야릇한 공간으로 두 사람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들어가려고요?”
“예, 예약을 해놓아서.”
“예약.”
예약이라는 말에 은서의 얼굴이 빨개진 채로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다.
대체 이 남자가 무슨 생각으로 모텔을 예약한 것인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섹스가 하고 싶다면 그녀의 집에서도 누구 눈치 보지 않고 충분히 할 수 있는데 왜 굳이 모텔을 예약한 것일까?
*
“우와.”
모텔에 생전 처음 들어와 보는 은서가 눈이 동그래져서 이곳저곳을 구경하고 있었다. 일단 입구를 통과해서 엘리베이터에 오르자 무안함이 많이 사라진 것이다.
모텔은 그녀의 상상과는 완전히 달랐다. 모텔이라는 단어로 연상되는 어두침침하고 퇴폐적인 이미지가 아니었던 것이다.
밝은 조명에 하트 모양의 큰 원형 침대. 천정을 가득 채우고 있는 엄청나게 큰 거울.
그리고 우아한 콘셉트의 소파에 엄청나게 큰 벽걸이 티브이까지 걸려 있다.
게다가 투명한 욕실 문을 열어보는 순간 은서가 감격한 나머지 발을 동동 구른다.
“여기 너무 멋져요. 월풀 욕조야, 난 몰라.”
이한은 월풀 욕조가 뭔지 모른다. 솔직히 말하자면 스파 욕조도 뭔지 모른다. 그게 그거라는 걸 이한은 모른다.
“어머, 어머.”
이번에 또 무엇 때문에 은서가 감격하는 것일까? 그녀의 손에 뭔가 들려 있다.
“그게 뭐예요?”
“바스밤이요. 입욕제. 향 좋다.”
“입욕제?”
처음 들어본 말에 이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것 봐요. 욕조 앞에 텔레비전이 있어요.”
은서의 말에 이한이 그녀가 가리키는 손끝을 쳐다본다.
그녀의 말처럼 욕조 바로 위에도 텔레비전이 걸려 있었다. 목욕을 하면서 드라마라도 보라는 뜻인가?
“여기 시설 너무 좋아요. 어떻게 이런 곳을 예약했어요? 여기 비싸죠?”
“그, 그다지.”
이한이 애써 둘러댔다. 태경이 비밀로 해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아마 지금쯤 태경과 혜주도 이 모텔 어딘가의 객실에 들어가 있을 것이다.
‘뭐부터 해야 하지?’
“아, 그렇지. 영화 볼까요? 극장 못 갔으니까.”
은서가 저녁 먹을 때 영화 이야기를 꺼낸 것을 떠올린 이한이 리모컨을 들어서 스위치를 켰다. 바로 신호가 들어오며 화면이 밝아진다… 싶었더니.
“아앙! 아아앙!”
“윽! 으윽!”
“아아아앙!”
이상야릇한 소리가 방안을 순식간에 가득 채웠다.
“.....”
이한이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말았다. 그렇다. 첫 채널이 포르노였던 것이다. 일명 모텔 포르노.
*
틱.
은서가 몰래 리모컨을 누른다. 그리고 얼른 볼륨을 줄인다.
힐끗 돌아본 욕실 안에서 물소리가 나고 있었다. 욕조에 물을 받으러 이한이 욕실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물 온도 조절 잘해야 해요!”
은서가 미리 당부를 한다. 이한을 욕실에서 나오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왜 나오지 못하게 하려는 거냐고? 조금 전에 나왔던 그 야릇한 채널을 몰래 보고 싶어서랄까.
틀자마자 나왔던 엄청난 화면에 이한이 놀라 금방 꺼버렸지만 그 자극적인 영상이 계속 은서의 눈 안에 왔다 갔다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한에게 욕조에 물을 받아놓으라 시키고 혼자서 볼륨을 줄이고 몰래 보는 은서였다.
‘우와… 저런 자세가 가능해?’
은서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이한과 할 때는 줄곧 한 가지 자세뿐이었다.
그녀가 눕고 이한이 위에서 한다, 그것 외에는 없었다.
그런데 지금 화면에 나오는 남녀는 그녀가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자세를 하면서 그것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와, 우와.’
엎드린 여자의 뒤에서 남자가 하는 것은 예사, 여자를 옆으로 비스듬히 눕힌 채로 한쪽 다리를 들어 올려 그 사이로 남자가 하기도 한다.
‘어떡해… 어떡해. 너무 야해.’
그러면서도 그녀가 채널을 돌리지 못했다. 화면이 빨려 들어갈 듯이 시선을 고정한 채로 은서가 입을 떡 벌리고 몰입하는 중이다.
‘꺄악! 저건 또 뭐야?!’
은서가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지를 뻔했다. 화면 안에서 진짜 엄청난 것을 봤기 때문이다.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것. 그 엄청난 자세를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물 다 받았어요.”
이한이 욕실에서 나오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은서가 황급히 텔레비전을 껐다.
저런 걸 보고 있었다는 걸 들키면 안 된다. 가뜩이나 적극적인 모습만 보였는데 혼자서 저런 걸 보는 걸 들켰다가는 밝히는 여자로 오해받을 것이다.
아니다, 이미 밝히는 여자로 찍혔나?
“먼저 씻어요, 은서 씨.”
이한의 말에 은서가 욕실로 가려다 말고 돌아본다.
“욕조가 2인용인데.”
“네?”
“2인용이라고요.”
은서가 욕조를 가리켰다.
“같이 씻을래요?”
그 순간, 이한이 2인용 욕조의 쓰임새를 알게 됐다. 왜 욕조가 2인용이 필요한 것인지. 같이 몸을 담그라는 의미에서 2인용.
같이.
같이.
이한의 얼굴이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썼다.
“가, 같이 씻죠.”
이한이 대답했을 때 은서는 이미 옷을 벗고 있었다. 신경 써서 차려입은 셔링 블라우스가 그녀의 몸에서 흘러내리는 것을 이한이 슬쩍 훔쳐봤다.
이한이 티셔츠를 벗고 다시 그녀를 쳐다봤을 때 그녀는 이미 욕조 안에 들어가 앉아 있었다. 그녀의 말간 어깨가 물 밖으로 나와 있었다.
*
“예쁘죠?”
이한이 옷을 벗고 욕실로 들어오자 은서가 욕조 안의 물을 가리킨다.
물빛이 핑크빛이었다. 그녀가 러브밤을 물에 녹인 것이다.
그 핑크빛 물빛 아래 은은히 비치는 그녀의 알몸에 불끈거리는 하체를 이한이 얼른 손으로 가린다.
그리고 잠시 고민한다. 샤워를 하고 들어가야 할지 아니면 그냥 들어가야 할지. 은서는 벌써 들어가 있다.
“들어와요.”
“샤워 먼저 하고요.”
“아, 나 샤워 안 했는데.”
이한이 샤워기의 물을 틀려고 할 때 촤악, 하는 물소리가 나며 은서가 욕조에서 걸어 나왔다.
물기가 떨어지는 은서의 알몸에 이한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의 알몸을 처음 본 것이 아니지만 욕실에 물기 어린 알몸을 보는 것은 처음인 것이다.
그리고 젖은 그녀는 평소의 그녀보다 더 은밀한 분위기를 풍겨내고 있었다.
아마도 이곳이 익숙한 집이 아니라 모텔이라는 것도 이 은밀한 분위기를 한몫 거들고 있을 것이다.
“나도 같이 샤워할래요.”
차가운 물기로 젖어 있는 바닥에 은서가 살며시 무릎을 꿇고 앉아 샤워기를 손에 들고 있던 이한이 조심스럽게 물어본다.
“씻겨줄까요?”
“네에.”
그녀가 작게, 아주 작게 대답했다. 실은 2인용 욕조를 봤을 때부터 이한이 이렇게 해주었으면 한 그녀였다.
이한이 그녀의 뒤에서 무릎을 꿇었다.
손바닥으로 바디워시의 거품을 내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부드러운 감촉이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응.”
이한의 손이 그녀의 어깨를 천천히 어루만지며 천천히 양쪽 팔로 내려왔다.
그녀의 어깨와 팔, 그리고 손목까지 거품을 발라주던 이한의 손이 그녀의 등에 닿는다.
등이 그의 손에 문질러지자 은서가 작게 신음했다.
단단한 손바닥이 그녀의 알몸을 거품과 함께 문지르는 느낌이 생소한 쾌감을 그녀에게 안겨주고 있었다.
천천히 겨드랑이로 옮겨온 손이 그 선을 따라 그녀의 엉덩이까지 미끄러졌다.
“으응.”
이한의 거품투성이 손이 그녀의 엉덩이에서 다시 가슴으로 이어졌다.
“읏.”
그 손길에 그녀의 허리가 움찔거렸다.
“으응.”
그의 손바닥이 그녀의 가슴을 문질렀다. 거품과 함께 미끄럽게 문질러지는 가슴의 애무에 그녀가 고개를 뒤로 젖혀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다.
“으응… 응.”
등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듯 손을 내민 이한이 그녀의 양쪽 가슴을 부드럽게 거품을 칠해가며 주물렀다.
그 손이 천천히 아래쪽으로 내려간 것은 그때였다.
“하읏.”
거품이 하얗게 인 손이 그녀의 수풀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어떡해. 너무 좋아.’
은서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로 아랫배를 들썩였다. 이한이 그녀를 씻겨주는 것이 이렇게 좋은 느낌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었기 때문이다.
이런 건 줄 알았다면 집에서 섹스를 했을 때도 같이 씻자고 했을 것이다. 이런 느낌인 줄 알았더라면 말이다.
이한의 가슴도 은서의 몸에서 옮겨온 거품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거품으로 미끈거리는 두 사람의 몸이 비벼지며 젖은 부분에서 열기가 피어올랐다.
“응…!”
이한의 손가락이 그녀의 은밀한 입구를 찾아내고 조용히 파고들고 있었다.
거품으로 미끈거리는 손가락이 거품이 가득한 입구로 들어오는 순간 은서가 뜨거운 쾌감에 몸을 젖혔다.
“아아아…!”
뒤로 젖혀지는 그녀의 몸을 이한이 끌어안았다.
“아아. 더… 더 깊숙이.”
이한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으며 은서가 달콤하게 속삭였다. 이 야릇한 공간 안에서 이미 그녀의 이성이 외출을 시작하고 있었다.
이제 이한의 이성만 외출해버리면, 이성이 동시에 외출해버린 두 사람이 무슨 일을 할지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
“으응…!”
노골적인 신음소리에 은서를 등 뒤에서 끌어안고 있던 이한이 적잖게 당황하고 있었다.
은서가 이렇게 대담하게 나온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원래 자기표현이 확실한 여자이긴 했지만 지금은 평소보다 훨씬 대담하게 반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한의 손가락이 미끄러질 때마다 거품을 온몸에 바른 은서의 몸이 야하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욕실 안에 가득 찬 수증기와 거품이 두 사람의 피부가 부딪칠 때마다 미끄러지게 했다.
“읏.”
그녀의 몸을 만지며 이한이 아찔한 숨을 토해냈다.
- 죽여줘요.
태경이 말한 의미가 이런 것이었다.
‘으… 태경 씨 엄청 좋은 사람이야, 정말.’
애써 거친 숨을 죽여 가며 이한이 거품으로 미끈거리는 손을 움직였다. 그가 손을 움직일 때마다 은서가 더 세게 그의 팔에 매달렸다.
“으응… 이한 씨…!”
이제는 이한의 가슴에 몸을 눕히고 두 팔로 그의 목을 끌어안은 채로 목을 젖히고 신음하는 은서의 모습에 이한이 호흡이 곤란해지고 있었다.
바로 눈앞에서 거품이 발라진 은서의 알몸이 유혹해오고 있었다. 그걸 보는 순간 뭔가 정신이 아찔하게 혼미해지는 것이다.
거품, 그리고 가슴과 뜨거운 헐떡임. 이한의 호흡을 마비시키기에 충분한 삼박자라고나 할까.
이미 아침에 지원이 애써 만들어준 머리는 젖은 채로 다 헝클어져 있었다.
정신이 혼미해서 자제심이 달아나버린 것일까? 자제심이 달아나자 숨어있던 늑대의 본성이 올라온 것일까?
평소의 이한이라면 절대로 생각할 수 없을 만큼의 힘을 실어서 그가 그녀의 안쪽을 손가락으로 찔러댔다.
“으응! 읏…!”
점점 더 거칠어지는 그녀의 숨소리를 들으며 이한의 손가락에 더 힘이 들어간다. 이렇게 거칠게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언제나 만지면 부서질 듯 소중하게, 조심스럽게 애무했을 뿐 이렇게 격렬하게 애무하는 것은 이한도 처음이었고, 이런 격렬한 애무를 받는 것은 은서도 처음이었다.
두 사람 모두 첫 경험 앞에서 아찔한 숨만 헐떡였다. 쾌감이 은서의 전신을 누비며 그녀의 머릿속을 녹여가고 있었다. 분명히 샤워가 목적이었는데 이미 샤워기는 한쪽 구석에서 벽으로 물을 뿌리며 혼자 뒹굴고 있었다.
‘아, 콘돔.’
왜 하필 이런 때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 들었는지 모른다.
이한 욕실 밖으로 힐끗 시선을 던졌다. 침대에 벗어둔 바지 안에 콘돔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 번도 콘돔을 쓰지 않고는 관계를 가져본 적이 없다. 그런데 지금 이 욕실에는 콘돔이 없다. 몽땅 벗고 들어왔기 때문에 콘돔을 가져올 수도 없었고 또 가져올 정신도 없었다.
자신의 품 안에서 손가락의 애무를 받으며 뜨거운 신음을 흘리고 있는 은서를 내려다보며 이한이 갈등에 빠졌다.
‘어떻게 하지? 잠깐 나갔다 온다고 할까?’
하지만 그건 말도 안 되는 생각이라는 건 이한도 안다. 이 상황에서 어떻게 콘돔을 가지러 갔다 온다 하겠는가.
‘그러면… 조절을 잘한다든가.’
조절도 가능하다고 들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얼른 빼버리면.
‘그러다가 실패하면?’
이 뜨겁고 야릇한 상황에서 이한이 어울리지 않는 온갖 고민에 빠져들고 있었다.
‘은서 씨가 언제 그걸 했더라?’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가임주기까지 계산해보려 했지만… 모른다. 그런 건 모른다, 계산하는 방법도. 왜? 여자가 아니지 않은가.
‘만약의 경우에 실패해도 다 임신하는 건 아닐 거야. 그래, 그럴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