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맛-7
남자의 맛-7
한 번에 콘돔에 담겨지는 양이 꽤 된다. 만약 이것이 콘돔이 아닌 은서의 질에 곧장 뿌려지면 그야말로 주룩주룩 흐를 것이다.
하지만 한 번도 콘돔이 아닌 곳에 뿌린 적은 없다. 그래서 뒤처리가 한결 가벼운 것이 그나마 이 상황에서 위안이라면 위안이다.
“으응, 응, 으응!”
이한의 허리가 밀어댈 때마다 은서의 다리가 치켜 올라가 그녀의 발끝이 차 천정에 부딪쳤다.
젖혀진 좌석에 누운 채로 희미하게 뜬 그녀의 열기 가득한 눈동자에 그녀 자신의 흔들리는 다리가 들어왔다.
그리고 그 아래에서 뜨거운 땀을 흘리며 움직이고 있는 남자의 모습도.
벌써 6월 중순. 그렇지 않아도 뜨거운 차 안이 열기로 가득 채워진다.
“아, 아, 아아…!”
“흐윽…!”
그녀의 입술에, 그리고 뺨에 키스하며 이한이 허리를 움직이는 동안 은서가 그 끈적한 땀과 함께 절정감에 휩싸이고 있었다.
대체 얼마나 정신없이 허리를 흔들었던 것일까. 얼마나 뜨겁게 신음하며 그에게 매달렸는지 알 수 없었다.
개방된 공간이라는 공간적 자극이 아마도 두 사람을 더 뜨겁게 달아오르게 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미 옷이 구겨질 대로 구겨진 은서의 전신이 땀에 젖어 있었다.
땀에 젖기로는 이한 역시 마찬가지였다. 에어컨이 고장 난 이 낡은 트럭에서의 섹스는 결국 땀의 홍수를 불러오고 말았다.
거칠게 숨을 내쉬며 두 사람이 한 가지 교훈을 얻었다. 여름에는 절대로 에어컨이 고장 난 차 안에서 섹스를 하면 안 된다는 절대적인 교훈을.
*
“그럼 내일 점심에 봐요.”
“운전 조심해요.”
은서가 손을 흔들자 이한이 싱긋 웃어주며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이한의 차가 멀어질 때까지 아파트 입구에 서서 손을 흔들어주던 은서가 그의 차가 마침내 보이지 않게 되자 그제야 돌아섰다.
땀으로 흠뻑 젖어서 빨리 집에 돌아가 씻고 싶은 그녀였다.
자신도 자신이지만 땀에 젖은 채 바로 알바 뛰러 가는 이한이 걱정이기도 했다.
한밤중에 집에 돌아가 샤워하기 전에는 그 땀이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괜히 차 안에서 하자고 했다고 후회하며 은서가 아파트 입구로 들어섰다. 들어서는 순간 그녀가 걸음을 멈췄다.
“과장님?”
그녀의 눈이 커지며 얼굴이 굳어진다. 아파트 입구에 윤기수가 서 있었던 것이다.
놀라 뒤로 한발자국 물러서려는 은서의 손목을 윤기수가 잡아챘다.
“꺅!”
“어딜 도망치려고!”
“놓긴 뭘 놓아?! 저 놈 그때 그놈이지?!”
아마 이곳에서 은서가 이한의 차에서 내리는 것을 훔쳐본 것이 분명했다.
“네년들 때문에 내가 지방으로 쫓겨 가게 생겼는데, 내가 나만 죽을 것 같아?!”
“과장님이 잘못하신 거잖아요! 제게 왜 이러세요?!”
자기가 여직원들을 건드려서 좌천되게 생겼으면서 애꿎은 은서에게 분풀이를 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내가 갈 땐 가더라도 네 년 한 번 따먹고 만다!”
“소리 지를 거예요!”
“지르긴 뭘 질러?!”
그 말과 함께 윤기수의 우악스런 손이 은서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기를 기다려 그녀를 안으로 끌고 들어간다.
“읍! 읍!”
끌려들어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은서의 발에서 구두가 벗겨져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
“라면 먹고 가.”
“아니, 오늘은 집에 일찍 들어가 보려고.”
“왜? 형이 일찍 온대?”
“아니. 그런 일이 있어서.”
“그래?”
같이 공연을 하는 민규가 실망어린 표정을 짓는다.
민규는 지원이 대학에서 만난 친구다. 같은 과는 아니지만 텅 빈 강의실에서 혼자 노래를 부르는 지원의 목소리에 반해 민규가 기타를 자청한 것이다.
수준급은 아니지만 연주하기에 부족하지는 않을 만큼 기타를 치는 민규 덕분에 지원이 주말마다 길거리 공연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믹서며 스피커의 대여에 필요한 돈은 모두 민규가 대고 있었다. 용돈을 넉넉히 받는다며 지원의 후원자 역할을 자처하는 민규, 이 친구가 지원에게는 든든한 힘이 되는 것이 사실이다.
가수가 꿈이었다는 민규는 가수가 될 만큼 노래를 잘하지는 못했기에 일찌감치 꿈을 접었다고 했다.
그런 민규에게 지원은 꿈의 대리인과 비슷한 것이다.
지원의 목소리에 기타를 반주해주며 민규 역시 접어버린 꿈을 꾸는 시간이 바로 두 사람이 거리로 나서는 순간이었다.
“주말에 몇 시에 만날까?”
“다섯 시로 하자.”
“알았어, 다섯 시.”
“그럼 그때 보자.”
지원이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등 뒤에서 현관 문 닫는 소리를 들으며 지원이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날이 더웠다. 6월 중순인데 벌써 초여름의 열기가 느껴진다.
‘옷이 낡았던데.’
지원이 이한의 낡은 티셔츠를 떠올렸다. 옷이 몇 벌 되지 않아 늘 입는 것만 입으니 금방 낡아 헤어져 버린다.
지원이 발끝을 내려다봤다. 지난주에 이한이 사온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제법 비싼 메이커라는 건 지원도 알고 있다. 자신에게는 이런 비싼 신발을 사주며 정작 본인은 낡은 티셔츠를 입고 다닌다.
‘토요일에 민규 만나기 전에 동대문이나 가볼까.’
가서 티셔츠를 몇 벌 사자고 지원이 생각했다.
‘내 걸 샀는데 커서 못 입겠다고 하지, 뭐.’
형을 주려고 샀다는 말은 죽어도 못한다. 그러니까 둘러댈 핑계거리를 찾아야 한다.
다행이 이한이 더 크고 지원은 그보다 작으니까 사이즈가 맞지 않는다는 핑계면 적당할 것이다.
싼 거라서 교환도 안 되고 환불도 안 된다고 우기면 그만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아래에서 누가 꿈지럭 거린 것인지 벨을 누른지 한참 만에 올라온 엘리베이터였다.
문이 열리는 순간 자연스럽게 타려던 지원이 놀라 걸음을 멈췄다.
“읍…! 읍…!”
엘리베이터 안에서 도움을 청하는 여자의 눈과 마주쳤기 때문이다.
여자의 머리카락은 헝클어져 있었고 한 쪽 발에는 신발도 벗겨진 채였다.
그리고 여자의 입을 틀어막은 남자가 숨을 씩씩거리며 여자의 허리를 꽉 끌어안고 있었다.
이건 누가 봐도 성추행범이다.
“뭘 봐?! 어린놈의 새끼가!”
엘리베이터에 타려던 지원이 멈칫거리자 윤기수가 지원을 향해 소리를 버럭 지른다.
딱 봐도 어리게 보이는 지원을 우습게 본 것이다.
다시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려 하자 은서가 간절한 눈빛으로 지원을 쳐다봤다.
이대로 위층으로 올라가버리면 더 이상 도움을 청할 때가 사라지는 것이다.
문이 닫히기 직전 지원이 엘리베이터 문에 발을 끼워 넣었다.
“당신 뭐야?!”
지원이 윤기수를 향해 목소리를 높인다.
“꺼지라니까 이 새끼가!”
“그 여자 당장 안 놔줘?!”
안경을 쓴 비쩍 마른 남자 애 따위 윤기수가 무섭지도 않다는 듯 코웃음을 친다.
지난번에는 웬 깡패 같은 놈에게 당했지만 그런 깡패 같은 놈만 아니면 윤기수도 한 주먹 하는 것이다.
이래봬도 복싱을 몇 달이나 한 것이다.
핵주먹까지는 아니라도 이런 꼬맹이쯤은 한 방에 날려 보낼 수 있다고 생각한 윤기수가 은서를 뒤로 밀쳐놓고 지원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어린놈이 어디서!”
“그런 당신은 나이 처먹어서 이게 뭐하는 짓인데?!”
날아오는 윤기수의 주먹을 살짝 피하며 지원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섰다. 지원의 등 뒤로 문이 닫히고 엘리베이터가 위로 올라간다.
“나 이 여자 애인이야!”
윤기수가 소리를 버럭 지르며 지원을 향해 덤벼들 때,
“웃기고 있네!”
지원이 몸을 낮춰 그 주먹을 피하며 순식간에 어퍼컷을 윤기수의 턱으로 날렸다.
퍼억-!
“큭!”
지원의 주먹이 윤기수의 턱에 그대로 작렬하며 윤기수가 그 자리에 풀썩, 쓰러졌다.
턱에 주먹이 제대로 들어간 것이다.
“살이 쪄서 몸도 둔한 아저씨가, 나이 값도 못하고.”
그렇다. 윤기수 자신은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겠다고 지원에게 덤벼들었지만 만 19세 지원이 보기에는 슬로우 동작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마흔 중반의 배 나온 아저씨가 한참 펄펄 뛰는 십대 후반의 청소년을 너무 우습게 본 것이다.
“괜찮아요? 경찰 부를까요?”
쓰러진 윤기수를 쳐다보며 지원이 구석에 밀쳐져 있던 은서에게 말을 걸었다. 너무 놀라 거의 정신이 없던 은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경찰, 경찰 불러요.”
이런 인간은 봐주면 또 이런 짓을 할 인간이다. 이참에 다시는 이런 짓을 못하게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은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112.”
지원이 핸드폰으로 경찰에 전화를 건 다음 쓰러진 윤기수를 질질 끌어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은서가 비틀거리며 걸어 나왔다.
구두 한 쪽을 잃어버린 은서가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애써 정리하며 지원에게 고개를 숙인다.
“고마워요, 학생.”
이 학생이 아니었다면 정말 봉변을 당했을 것이다.
“경찰 금방 온대요. 경찰 오면 증언하시고, 엘리베이터에 CCTV 있을 거니까 그거 증거로 제출해달라고 하세요. 이런 나쁜 놈은 콩밥을 먹여야 해요.”
“학생 연락처 하나만 남겨주면 내가 나중에 인사라도.”
“뭘요. 할 일 했을 뿐인데.”
“그래도, 내가 너무 고마워서.”
은서가 아직도 덜덜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꺼냈다.
“전화 번호 하나 남겨줘요. 그러면 내가 나중에.”
“안 그러셔도 돼요.”
“내가 고마워서 그래요. 연락처 하나만 줘요.”
“.....”
그냥은 보내줄 것 같지 않은 은서의 모습에 지원이 전화번호를 불러준다.
“010-9201.”
지원이 불러주는 전화번호를 은서가 핸드폰에 덜덜 떨리는 손가락을 눌러가며 입력한다.
“이름은요?”
“안지원이요.”
“.....”
이름을 누르려던 은서가 손가락을 멈췄다. 그리고 지원을 쳐다봤다.
“안… 지원…?”
설마 그 안지원이겠냐마는, 그래도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은서가 지원을 빤히 쳐다봤다.
*
“내가 누군 줄 알아?! 너희들 실수 하는 거야아아아-!”
발악을 하며 끌려가는 윤기수의 목소리를 들으며 은서가 손으로 귀를 막았다.
경찰이 가져다 준 구두를 신은 은서가 경찰의 질문에 대답하는 중이었다.
“나중에 경찰서 나오셔서 재진술 부탁드립니다. 필요하면 대질 심문 있을 수도 있는데 CCTV 자료 있으면 대질 신문까지는 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경찰서는 나오셔야 해요.”
“네.”
“학생도 나중에 경찰서 와서 진술서 써야 해.”
“네.”
지원이 경찰에게 전화번호와 주소를 불러주고는 은서를 쳐다본다. 은서는 아직 놀란 것이 진정되지 않아 보였다.
“저기, 혼자 괜찮으시겠어요? 누구 친구 분이라도 연락되면 불러서 같이 있는 게 좋지 않겠어요?”
아무래도 덜덜 떨고 있는 은서가 걱정인 것이다.
“친구.”
친구라는 말에 은서가 이한을 떠올렸다. 하지만 아직 이한의 알바가 끝나려면 멀었다.
그렇다고 일하던 중에 오라고 전화할 수는 없다.
그러나 혼자 있기는 무섭다.
윤 과장이 경찰에 잡혀 갔지만 그래도 혼자는 무서웠다.
이럴 때 이한이 곁에 있어주면 얼마나 좋을까.
은서가 핸드폰을 꺼냈다. 망설임 끝에 번호를 누르자 신호음이 간다.
- 여보세요?
수화기 너머에서 이한의 목소리가 들리자 은서의 눈에서 눈물이 터져버렸다.
지금까지 겨우 겨우 참고 있던 눈물이 이한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터져버린 것이다.
- 여보세요? 은서 씨? 왜 울어요? 무슨 일 있어요?
전화를 건 은서가 아무 말 없이 갑자기 울어버리자 당황한 이한이 자꾸 묻는다. 하지만 대답 대신 그녀가 전화를 붙들고 엉엉 울어버렸다.
- 은서 씨, 왜 그래요? 정말 왜 그래요?
아무리 물어도 은서가 울기만 하자 뭔가 일이 생긴 것을 짐작했을까.
- 기다려요. 내가 금방 갈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요.
이한이 전화를 끊는다. 그는 분명 최대한 빨리 달려올 것이다. 그에게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당장 그를 보지 않으면 이 무서움이 달아나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친구 분, 오신데요?”
지원의 말에 은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때까지만 있어 드릴게요. 저도 오늘은 빨리 집에 가야 해서.”
“고마워요, 학생.”
고맙다고 말끝을 흐리는 은서를 쳐다보며 지원이 가볍게 한숨을 쉰다.
오늘은 돌아가신 엄마의 생신이었다.
지원만 알고 있고 이한은 모르는 일이다. 죽은 엄마의 생신까지 이한에게 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부터는 엄마의 생신을 챙긴 것은 지원이었다.
작은 케이크를 하나 사고 엄마를 위해 장미꽃 다발을 준비했다.
그리고 지원이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주면 엄마는 눈물을 글썽이며 좋아했었다.
오늘은 일찍 집에 돌아가 작은 케이크와 장미 꽃 한 송이를 엄마 사진 앞에 두고 노래를 불러드릴 예정이었다.
갑자기 생긴 일 때문에 하지 못하게 됐지만, 엄마는 생일 축하보다는 도움이 필요한 여자를 구한 것을 더 기뻐하실 것이라고 지원이 생각했다.
“저어, 들어갈래요?”
계속 복도에 서 있기 뭐 했는지 은서가 조심스럽게 지원에게 물어본다.
“아니요. 전 그냥 여기 있다가 친구 분 오시면 갈게요. 그리고요, 누나.”
지원이 은서를 미덥지 않은 눈으로 바라본다.
“사람 함부로 믿지 마세요. 좀 도와줬다고 집에 들이고 그러면 또 무슨 일 당할지 몰라요. 저 모르시잖아요.”
“그건.”
“조금 전에도 그 사람, 아는 사람이라면서요. 같은 회사 사람이라면서요. 아는 사람이 더 무서운 거 모르세요? 사람 좋다고 막 덮어두고 믿고, 막 집에 들어오라 그러면 나중에 진짜 큰일당하는 수 있으니까, 조심 좀 하세요.”
“.....”
지원의 말이 틀린 것이 없어서 은서가 입술을 꼭 다물었다. 자기 딴에는 고마워서 한 말이지만 지원의 말이 맞는 것이다.
“누나는 들어가세요. 저 여기 있다가 친구 분처럼 보이는 분 오면 그냥 갈게요.”
“나도 그냥 여기서 기다릴게요.”
“마스카라 번졌어요.”
지원이 그 와중에도 지적하는 말에 은서의 얼굴이 살짝 붉어진다.
마스카라만 번졌겠는가. 옷차림도 엉망이고 머리도 잔뜩 헝클어져있다. 분명 웃기는 꼴일 것이다.
5분쯤 지났을까. 멍하니 복도에 서 있던 지원이 하품을 했다. 그냥 무작정 서 있으려니 졸린 것이다.
은서도 굳이 집에 들어가지 않고 지원의 옆에 서 있었다. 뭔가 무안한 느낌이 들어서 지원이 은서를 힐끗 쳐다본다.
“누나, 노래 좋아해요?”
“응?”
“밤이니까, 크게 부르면 사람들 싫어할 거고, 제가 작게 노래 불러드려요?”
“응?”
“심심하니까요. 저 노래 잘해요.”
“노래.”
“오늘이 우리 엄마 생신인데요, 작년에 돌아가셨어요. 엄마 생신에는 제가 늘 노래 불러드렸는데 이제는 불러도 듣지 못하시니까, 대신 누나한테 불러줄까요? 누나 놀랐으니까 진정도 좀 되라고.”
“좋아요. 불러줘요.”
이 ‘안지원’은 그 ‘안지원’이 아닐 거라고 은서는 생각했다. 동명이인일 것이다. 그 ‘안지원’은 낯을 심하게 가린다고 했다.
어쩌면 히키코모리가 아닐까 할 정도로 낯을 심하게 가리는 그 ‘안지원’이 이렇게 처음 보는 자신에게 노래를 불러준다 어쩐다 할 리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은서가 결론을 내렸다. 이 ‘안지원’은 전혀 다른 ‘안지원’이라고.
그 ‘안지원’이 이 ‘안지원’처럼 친절하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벌써 이한과 은서 자신, 그리고 ‘안지원’이 만나 정말 정다운 시간을 가졌을 텐데 말이다.
은서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지원이 아주 작은 소리로 노래하기 시작했다.
귀를 기울여 듣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소리였다.
아마 아파트의 다른 사람들에게 폐가 될 까봐 아주 작게 부르는 것 같았다. ‘April come she will'이라는 곡이었다.
작게 부르고 있었지만 그 목소리가 얼마나 부드럽고 감미로운지 은서가 귀를 기울이며 그 노랫소리에 눈을 감는다.
처음 듣는 노래였지만 음률과 가사가 그녀의 귀에 감기고 있었다.
몇 번이나 지원이 반복해서 노래를 부르는 동안 은서가 눈을 감고 그 남자를 떠올렸다.
왜 노래를 듣는데 이한이 떠오르는 것인지 그녀가 알 수 없었다. 그냥, 떠올랐다. 지금 그녀를 향해 달려오고 있을 그 남자가.
*
“.....”
지원이 옆을 힐끔 쳐다봤다. 복도의 벽에 기대고 앉아 노래를 부르고 있던 지원이 무거워진 어깨를 힐끔 쳐다봤다.
어느새 잠이 들어버린 은서가 지원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꾸벅거리고 있었다.
무서운 일에 놀라고 겁을 먹었다가 지원의 노랫소리에 긴장이 풀리며 잠이 들어버린 것이다.
복도에 앉아 지원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로 잠이 든 은서 때문에 지원이 잠시 고민했다.
어깨가 저리긴 했지만 너무 곤하게 잠든 여자를 깨우기도 그랬던 것이다.
‘무슨 여자가 이렇게 경계심이 없어?’
정말 불안 불안한 여자라고 지원이 생각했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여자인 것이다.
팅.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왔나?’
그녀가 부른 친구가 온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지원이 고개를 든다. 뛰어오는 발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지원아?”
놀란 목소리가 지원의 귀에 날아들었다.
“형?”
“너 왜 거기.”
그건 지원이 묻고 싶은 말이었다. 지금쯤이면 알바를 뛰고 있어야 할 형이 왜 여기에 있는 건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도 저렇게 숨을 헐떡이며, 마치 엄청 급하게 달려온 것처럼.
지원이 이한과 은서를 번갈아 쳐다봤다. 뭔가 믿기지 않는 조합이긴 하지만 상황은 지원에게 그가 짐작하는 것이 사실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형, 혹시.”
“은서 씨, 잠든 거야?”
이한의 그 말로 지원이 상황을 알아차렸다. 이 여자가 전화로 부른 친구가 형인 것이다.
그리고 형은, 이 여자의 울음소리에 모든 것을 다 팽개치고 숨을 헐떡이며 달려올 만큼 이 여자를 걱정한 것이다.
한 달. 자주 집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고 느끼고는 있었다.
평소에는 아무리 늦게 끝나도 밤에는 꼭 한 번씩 집에 들렀었고, 새벽에는 반드시 돌아왔었다.
그리고 주말에는 아침 늦게까지 자는 것이 일상이었던 형이 어느 순간부터 주말에는 새벽에 집에 돌아오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주중의 며칠 정도는 밤에도 집에 들르지 않게 되었다.
뭔가 이상하다고는 느끼고 있었지만 설마 이런 상황이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지원이었다.
여자가 생겼을 줄은. 기뻐해줘야 하는데 마냥 기뻐할 수 없는 것은.
“아는 사람이야?”
이 여자에게 자신이 차지하고 있던 형의 자리를 비워줘야 할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다.
형의 자리를 비워주면, 자신은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일까. 문득, 지원이 불안해졌다.
“아, 너한테 말하려고 했는데.”
“여자 친구야?”
어쩔 줄 몰라 하는 이한의 모습에 지원이 알아버렸다. 이럴 때면 감이 좋은 것은 쓸모가 없다.
몰라도 좋을 것을 알아버리는 건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자신이 형의 인생을 가로막고 있다는 걸 알아버리는 건,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형의 인생의 방해꾼이 자신이라는 사실을 안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아무 문제없던 형의 삶에 어느 날 암초처럼 자신이라는 혹이 붙어버린 것이다.
자기에게 신경 쓰느라 여자 친구가 생겼어도 마음 놓고 만나지도 못했을 것이 분명했다.
“왜 말 안 했어?”
“그건.”
“내가 거치적거리면.”
“지원아!”
이한이 저도 모르게 소리를 버럭 지르고 말았다. 이 밤에, 조용하던 아파트 복도가 울린다.
실례라는 걸 알지만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져버린 것이다.
“자꾸 그러면 형 화낸다.”
한 번도 화라는 걸 지원에게 내 본 적 없었다. 화 낼 일도 없었고, 화를 내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화가 났다.
- 내가 거치적거리면.
지원의 그 말에 이한이 처음으로 화가 났다. 자기가 이한에게 어떤 의미인지도 모르면서 제멋대로 말하는 지원에게 화가 났다.
얼마나 소중한 의미인지도 모르면서 자기 멋대로 혹 덩어리인 것처럼 말하는 지원에게 화가 났다.
“형 화나면 무서워. 그거 알아? 나도 화나면 무서워. 형은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지?”
‘내가 얼마나 불안한지 형은 모르지? 모르지?
형이 언제까지나 내 형으로 있어주지 않을까 봐 내가 얼마나 불안한지 모르지?
내가 왜 형한테서 용돈을 안 받는지 형은 모르지?
형에게 기대는 법을 알았다가 나중에 형이 내 형이 아니게 되면 그때 상처받기 싫어서 내가 형에게 기대지 않으려 한다는 거, 형은 모르지?
아무것도 모르지?
언젠가 형이 떠날 날이 올까 봐 내가 지금부터 혼자 사는 법에 익숙해지려 한다는 거, 형은 모르지? 바보니까 모르지?’
“네가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으니까 모르는 게 당연하잖아. 넌 내가 물어도 아무것도 대답해주지 않으니까. 내가 어떻게 널 알겠어?”
“제대로 물어보지도 않았잖아. 매일 바보 앵무새처럼 밥 먹었느냐고만 물었지, 용돈 필요하지 않느냐고만 물었지, 뭐 사줄까 그런 것만 물었지, 진짜 중요한 건 한 번도 물어보지 않았잖아.”
이한이 화가 났다. 아무것도 모르지 않느냐는, 진짜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았다는 지원의 말에 화가 났다.
그저 낯을 가린다고, 처음이라 어색해서 그런다고, 시간이 지나면 차차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던 자신에게 화가 났다.
설마 지원이 스스로를 짐 덩어리라고 생각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자신에게 화가 났다.
짐 덩어리라고 생각해서 곁을 두지 않는 것도 모르고, 다만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라고 아무렇지 않게 여겼던 자신에게 화가 났다.
좀 더 물어볼 것을… 하며. 귀찮을 정도로, 아니 귀찮게 해가며 더 관심을 쏟아줄 것을… 하면서. 그래서 자신이 짐이 아니라는 것을, 거치적거리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주지 못한 것이 화가 났다.
소중한데, 정말 소중한데, 잘해주고 싶은데, 누구보다 아껴주고 싶은데, 그 마음을 말로 표현하지 못했던, 그래서 지원을 불안하게 만들었던 자신에게 화가 났다.
“지원아, 형은.”
“난 형 생일이 언제인지도 몰라. 나한테 그런 거 한 번도 말해준 적 없었잖아. 내 생일 한 번도 며칠이냐고 물어본 적도 없었잖아. 형에 대해서 가르쳐주지도 않고 나에 대해서 물어보지도 않고… 꼭 남처럼 조심스럽게 대하기나 하고.”
“지원아.”
“난 형 동생인데.남이 아닌데.”
거기까지 말한 지원이 왈칵 울음을 터트렸다. 엄마의 장례식장에서 울음을 보인 이후 처음 흘리는 눈물이었다.
바닥에 앉은 채로 왈칵 울음을 터트린 지원 앞에서 이한이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으응.”
은서가 잠에서 깨어난 것은 그때였다. 뭔가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기대어 있던 어깨가 흔들렸기 때문이다.
“으응… 지원 학생…? 이한 씨?”
그녀가 졸린 눈을 들어 올리며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봤다.
“왜 울어요? 지원 학생?”
몸이 나른해서 기대고 있던 어깨에서 머리를 떼지 않은 채 묻는 은서를 향해 지원이 울다가 대답했다.
“누나 머리가 무거워서 어깨가 저리잖아요. 으씨, 침도 흘렸어.”
애꿎은 은서에게 화살이 돌아가고 있었다.
*
냉장고 앞에서 은서가 잠시 망설였다. 뭘 대접해야 좋은 것일까?
그녀의 냉장고 안에는 맥주와 탄산과 우유가 들어있다. 그나마 이한이 가끔 여기서 식사를 하게 되며 채워진 냉장고 안이다.
그 전에는 오직 맥주만이 들어있던 냉장고에 사온 것이지만 그래도 김치며, 달걀, 그리고 햄 종류라도 들어 있는 것은 전적으로 이한 덕분인 것이다.
‘그래도 아직 애니까 탄산으로 해야지? 맥주는 곤란하겠지?’
스무 살이라지만 은서의 눈에는 지원이 아직 ‘애’로 보인다. 아무래도 이한의 ‘애’라는 인식이 강해서일 것이다.
은서보다 키도 크고 힘도 세겠지만 그동안 상상해왔던 낯가리는 ‘애’의 선입견이 강해 스무 살 성인으로는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놀랐어. 그 안지원이라니.’
설마 했지만 그래도 아닐 것이라 생각했었다. 세상에 안씨 성을 가진 지원이라는 이름이 한두 명이겠는가.
당장 싸이월드 사람 찾기에 같은 생년월일에 그 이름을 쳐도 수백 명은 뜰 것이 분명하다.
설마하니 그 안지원을 자신의 아파트에서 마주칠 줄은, 그것도 그런 상황에서 도움을 받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고맙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하고, 뭔가 어색하기도 해서 은서가 뒤를 흘끔 쳐다본다.
하지만 그녀가 아무리 어색해도 저 형제만큼 어색하랴.
‘나는 나라서 어색하다지만, 자기들은 왜 어색한데? 형제 아냐?’
형제가, 저 두 형제가 꼭 초면인 것처럼 어색하게 마주보고 앉아 있어서 더 어색한 은서다.
마실 것을 가져오겠다며 주방으로 도망치지 않았으면 정말 어색해서 돌아가셨을 것이다.
‘그런데.’
탄산음료를 컵에 따르며 은서가 기억을 떠올렸다.
‘노래는 잘 하더라.’
꼭 자장가처럼 들리는 그 감미로운 목소리에 마음이 편안해졌던 것을 떠올리며 은서가 참 닮은 형제라고 생각했다.
정말 닮았다. 생긴 것은 전혀 닮지 않았는데 느껴지는 분위기는 완전 붕어빵이다.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타고 나는 것일까.
‘그러면.’
조금 발칙한 상상을 해버린 은서가 그만 탄산을 컵 옆에 살짝 흘리고 말았다. 진짜 발칙한 상상을 해버린 것이다. 이한과 자신이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면 태어나는 그 아이도 이한을 닮아 다른 이들을 편안하게 해주는 사람이 될까 하는 그런 발칙한 생각.
‘으응… 좋겠다. 그러면 진짜 좋겠다.’
결혼, 아이. 지금까지 외로울 때마다 애인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다른 직원들의 책상 위에 놓인 가족사진을 보며 부러움을 느끼긴 했지만 이렇게 진하게 결혼과 아이를 생각한 적은 없었다.
결혼, 아이. 진짜 가족이 된다. 이한과 은서 자신, 그리고 아이. 아, 거기에 지원도 살짝 끼워줄 마음은 있다. 물론 살갑게 군다는 조건 하에.
반항하거나 틱틱거리면 국물도 없다고 생각하며 은서가 쟁반을 들고 주방에서 나갔다.
“이 아파트에 친구가 살아?”
잠시 어색함을 깨고 이한이 지원에게 물었다. 늘 지원을 어른스럽다고 이한은 생각해왔었다.
처음 장례식장에서 제법 의젓하게 있는 모습을 봤기 때문일까. 이한의 눈에 비친 지원은 어른스러웠다.
슬픈 것도 꾹꾹 참고 힘든 티도 내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이 어른스러웠다. 그래서 실은 애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른스러워서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리라 생각한 것이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는 걸 알지 못했다.
배려를 거리감으로 느끼고 있을 줄은 몰랐었다.
거리감을 느껴 말이 없는 것을 그저 낯가리는 것으로, 어색해서 시간이 해결해줄 것으로만 여겼던 것을 후회했다.
그 나이 때 애들은 다 그런 것이라고 자신이 생각하고 있을 때 지원이 혼자서 느꼈어야 했던 불안감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었다.
그건 아마도, 이한 자신이 혼자 컸기 때문에 그런 것이리라.
형제라는 것을 한 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어서, 형제에게 어떻게 대해야 좋을지 몰라서 그랬던 것이리라.
그저 필요한 것을 모두 채워주는 보호자 역할을 하면 되겠지 하고 생각했기 때문이리라.
가족을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어서, 가족에게는 어떻게 하면 좋은 건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그저 열심히 일 해서, 열심히 필요한 것을 채워주고, 부족함이 없게 해주면 그것으로 되는 것이라고 혼자 생각했기 때문이리라.
그 열심히 일하는 동안 집에 혼자 남아 있던, 혼자서 밥을 먹고, 혼자서 잠이 들던 지원의 마음은 몰랐던 것이리라. 어떤 마음으로 빈 집에 혼자 있었을지.
‘알바를 줄이자.’
‘그리고 지원이와 좀 더 시간을 같이 보내자.’
지원이가 다니는 학교에도 한번 가보고, 지원이의 친구들도 한번 만나보자는 생각을 이한이 했다.
알바를 줄이고 지원이와 함께하는 시간을 더 갖는 것이 진짜 형이 해줘야 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진짜 형이라면.
“너 주먹 세다고 은서 씨가 그러더라? 무슨 운동 했었어?”
“운동 안 했어. 운동 안 해도 그런 배 나온 아저씨는 문제없어.”
언제 울었냐는 듯 지원이 무뚝뚝하게 대답한다.
“주말에 형하고 체육관 가볼래? 주말에만 운동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나 운동 싫어해. 그리고 주말에는 친구들하고 거의 약속 잡혀 있어.”
“주말마다?”
“형도 주말에는 데이트해야 할 거 아냐.”
“.....”
지원이 툭 던진 말에 이한이 대답을 찾지 못한다. 그런 것이다.
주말에는 은서와 밀린 데이트를 해야 한다. 만약 주말에 지원이와 체육관을 가야해서 데이트를 못한다고 하면 분명 은서에게.
“주말에 뭐 한다고요?”
음료수를 가져온 은서가 두 사람의 앞에 떡 하니 버티고 서 있었다. 분명 이한의 말을 다 들었을 것이다.
당황한 이한이 땀을 삐질 흘리며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자 지원이 대신 대답했다.
“주말에 누나하고 데이트한다고 하네요. 그런데 누나, 이렇게 후줄근한 남자 데리고 다니기 안 창피해요?”
지원의 폭탄 발언에 이한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자기가 차림새가 좀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대놓고 ‘후줄근한 남자’라는 말을 들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옷 좀 사 입으라고. 형 생각해서가 아니라 같이 다니는 누나 생각해서. 사람이 생각이라는 게 없어.”
할 말 다 해버리는 지원을 보며 은서가 한마디로 대답한다.
“너 좀 괜찮다.”
어디의 누가 낯을 가린다고? 누가? 이 성격 좋은 애가? 지원이 아주 마음에 들어버린 은서였다.
*
“저 누나 있잖아.”
돌아가는 차 안에서 지원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제는 혼자서도 괜찮다는 은서를 두고 이한이 지원을 집에 데려다주는 중이었다. 지원을 데려다주고 알바를 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앞으로 혼자 괜찮겠어?”
“응?”
지원이 하는 말을 이한이 이해하지 못했다.
“뭐가?”
“그런 놈들 한 번 앙심 품으면 두 번이고 세 번이고 같은 짓 저지를 수 있어서 하는 말이야.”
“경찰에 잡혔잖아.”
“형 바보야?”
지원이 운전하고 있는 이한을 힐끗 쳐다본다. 정말 사람 좋은 것 빼고는 어리숙함 그 자체인 것이다.
“성폭행 미수는 구속 안 되는 경우도 많아. 아무리 증거가 아니라, 증거 할아버지가 있어도 성폭행 미수는 법정까지 가지도 않아. 그냥 벌금 조금 내고 훈방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아주 심각하게 가야 불구속으로 법정에서 공판 받고 집행유예 몇 달 떨어지면 다행이고.”
“그런 법이 어디 있어?”
“아무래도 저 누나 혼자 두는 거 불안 불안한데. 저 누나 다른 가족은 없대? 혼자서 산대?”
“다른 가족?”
“몰라? 둘이 사귄 지 한 달 넘었다며. 그런데 그런 것도 몰라? 형 정말 저 누나하고 사귀는 거 맞아?”
지원이 기가 막히다는 듯 말했다. 이건 자기에게만 그런 줄 알았더니 이제 보니 사귀는 여자에게도 똑같은 것이다.
대체 뭐가 무서워서 물어볼 걸 묻지도 못하고 그저 상대방 쪽에서 먼저 모든 걸 술술 말해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거란 말인가.
말해주고 싶어도, 묻지 않아서 말해주지 못하는 걸 수도 있다는 걸 이 바보 같은 남자는 모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궁금은 했지만, 그냥 물어보면 안 될 것 같아서 안 물어봤지.”
“그거 진짜 쓸데없는 배려라는 거 몰라? 진짜 혼자서 궁상이야.”
“가족이 따로 살고 있는 것 같아.”
이한이 은서의 집에서 본 가족사진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가족사진 안에는 은서와 부모님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형제는 없는 것 같고… 어디 시골에 사시는 걸까?”
“그걸 나한테 물으면 어떡하자고?”
일단 말문이 트이니 나오는 말마다 타박이다. 말을 안 하고 있을 때는 무뚝뚝했지만 말을 하기 시작하니 시어머니가 따로 없다.
그것도 할 말 안 할 말 가리지 않고 모두 해대는 것이 꼭, 은서와 판박이라 이한이 문득 지원이 자기 동생이 아니라 은서 동생이 아닌 걸까 하는 엉뚱한 생각까지 해보는 것이다.
“하여간에 혼자서 지내게 하는 건 반대야. 내가 보기엔 그 놈 반드시 또 저 누나한테 찝쩍거릴 거야. 괜히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잘 챙겨.”
“.....”
지원의 말을 들으며 이한이 조금 불안해진다. 지원의 말이 틀린 것이 하나도 없다.
그 윤 과장인가 하는 인간은 두 번, 세 번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다.
은서의 말을 들으니 이제 회사에서도 들켜 좌천된다고 하니 앙심을 품고 더 심한 짓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진짜 나중에 후회할 일 만들지 말고 제대로 대책을 세워야겠다고 이한이 생각했다.
“저기, 지원아.”
“.....”
이한이 불렀지만 지원이 괜히 자는 척 좌석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아 버린다.
“형이 복싱 가르쳐줄까?”
“.....”
대답이 없다.
“형이 복싱 가르쳐줄 테니까 넌 형 공부 좀 가르쳐줄래? 너 공부 잘하잖아.”
그 말에 지원이 실눈을 떴다. 이한은 앞을 보며 운전하는 중이었다.
“나 중졸이라서 어디 취업도 잘 못해. 그런데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살면 안 될 것 같으니까, 그러니까 네가 형 좀 도와줄래?”
“지금 공부해도 늦어.”
지원이 다시 눈을 감고 짧게 대답했다.
“.....”
“그냥 복싱 다시 해. 한 우물 파는 게 가장 좋잖아.”
“그걸로는 돈 못 벌어.”
“왜.”
지원이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연다. 늘 궁금했던 것이 하나 있었다. 지금 아니면 물어볼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지원이 망설임 끝에 물어본다.
“왜 프로 데뷔 안 했어? 나이 많잖아, 형.”
스물여섯 살. 중학생 때부터 복싱을 했다고 들었다. 그리고 중학교 졸업하자마자 운동만 했다고 했다. 그런데 왜 곧바로 프로가 되지 않았을까.
“프로 데뷔하면, 아마 경기에는 못 나가.”
“그게 뭐가 중요한데?”
“올림픽은, 아마 선수만 나갈 수 있으니까.”
“꿈도 크네.”
“선발전 끝까지 갔다가 항상 마지막에 미끄러졌어. 그래서 이번이 마지막이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하며 미련을 못 버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