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워 형-상
고마워 형-상
백민우.
나의 이름이다. 올해로 딱 서른 살이 되었다.
국내 유수의 IT 회사에 취직하여 3년이 지났다.
서울의 일류대학을 나와 취직하고, 안정된 직장 생활을 하며 주변의 부러움을 샀지만, 나에게는 한 가지 부족한 점이 있었다.
한 공공기관의 차관 자리에 계시는 아버지와 대학에서 미술을 강의하시는 어머니를 둔 나는 평균 이상의 부유함을 가진 가정에서 모자람 없이 자라왔다.
내 위로 형이 한 명 있다.
백민식. 올해 서른일곱 살이었다.
형도 마찬가지로 일류대학을 나와 대기업에서 근무하던 중 사내 벤처를 만들어 기술개발 혁신기업으로 지정받아, 이내 회사를 창업하여 벤처기업의 사장이 되었다.
특히 형은 벌써 7년 전에 같은 회사에 근무 중이던 직원과 연애를 시작하여 결혼하고 이쁘장하게 생긴 조카까지 생산하여 키우고 있는 한 가정의 가장이었다.
물론 나는 아직 애인이 없었다. 한 가지 부족한 점이 바로 그것이었다.
학교생활부터 직장인이 될 때까지 너무나도 단조로운 생활의 형태를 보이고 있던 나에게 여자와 인연이 생길 틈이 별로 없었던 이유가 가장 클지도 몰랐다.
인물도 반반한 게 생긴 타입으로 타인으로부터 잘생겼다는 말도 종종 듣지만, 평소의 생활에서 일탈을 경험해 보지 못했고, 또한 생김새와는 다리게 별로 말주변이 없어 여자들과 별로 말을 잘 섞지 못하는 단점도 있었다.
어쨌든 나는 서른 살이 된 지금까지 아직도 변변하게 여자를 사귀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태평하게 지내던 일상들. 그러나 나에게 생각하지도 않았던 미래가 펼쳐진 것은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내가 근무하던 회사의 기술연구소를 제주도로 이전한다는 전격 발표와 함께 그동안 제주도에 짖고 있던 건물의 완공 축하 행사가 펼쳐졌다.
원래는 휴양시설로 설계하여 직원 복지를 위해 사용하는 용도로 건물이 올라가는 것으로 일반직원들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새 용도 변경이 되어 본사에 근무하던 연구소 직원들이 난데없이 제주도로 이전을 하게 되는 상황이 되었다.
나 또한, 연구소 소속이었기 때문에 이전 근무 대상에 포함이 되었다.
그날 저녁, 부모님과 기나긴 상의 끝에 나는 제주도로 내려가기로 했고, 약 한 달 뒤 임시로 거처할 짐을 꾸려 제주도를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연구소가 제주도로 이전하는 과정에서 꽤 많은 직원이 사표를 던졌다는 사실도 나중에 알았고, 나 또한 사표를 써야 했을까. 라는 생각도 자주 하게 되었다.
제주도로 내려와 생활한 지 벌써 반년이 지나고 있었다.
처음 생활은 회사 내 기숙사에서 시작하였으나, 2인 1실을 쓰는 기숙사는 생활 공간이 너무 비좁고 사생활 침해를 당하는 경우도 종종 있어 3개월 만에 기숙사를 나와 회사 근방에 따로 원룸을 빌려 혼자만의 자취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형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민우야~ 형이 형수랑 같이 모레 제주도 내려간다~ 마중 나올 수 있지?"
신혼여행 이후, 5년 만에 가진 둘만의 여행. 형이 사업을 시작하고 바쁜 틈을 비워 마련한 형수를 위한 이벤트라고 했다.
형수의 나이가 서른넷. 아직 한 번도 제주도에 가본 적이 없다는 형수의 말을 듣고 형은 일주일간의 제주도 여행 이벤트 계획을 세워 결혼 5주년 기념 특별이벤트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벤트를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제주도에 이미 내려와 있는 내가 많은 도움을 주어야 한다고 심하게 강조까지 했다.
어쨌든, 제주도 생활 반년의 무료함을 약간이나마 덜 좋은 기회였고, 서울 집에 잘 올라가지 않는 나로서는 형과 형수를 오랜만에 볼 수 있어서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 앞일은 아무도 모른다고 했던가.
인생이 모두 계획에 따라 그려진 길을 따라 향해가는 것처럼 일직선 통행을 해왔지만, 그 길이 잘려있음을 미리 알지 못했다.
이틀 후, 토요일 오후 제주공항에 미리 나와 출구 앞에서 미리 형 부부를 기다리고 있었다.
출구를 향해 쏟아져 나오는 사람 대부분은 관광객일 것이었고, 그중 외국인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어 제주도가 명실상부한 국제 관광도시라는 느낌을 충분하게 주고 있었다.
많은 사람이 빠져나가고 사람들이 드문드문 빠져나올 때쯤 형 부부가 게이트를 나오고 있었다.
형은 베이지색 반바지에 흰 폴로 티와 운동화 차림이었고, 형수는 하늘거리는 흰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둘 다 머리에는 모자를 쓰고 벌써 선글라스를 끼며 여행의 재미를 초반부터 만끽하려는 분위기가 물씬 풍겨 나왔다.
"형. 여기!!!"
"어. 그래. 민우야"
내가 형을 향해 손을 흔들었고, 나를 본 형 부부도 나를 향해 웃으면서 손을 흔들면서 나에게 다가왔다.
"야. 우리 동생. 이게 얼마 만이냐?"
"도련님. 잘 계셨어요?"
딱 반년만이었다. 제주도로 내려오고 나서는 지금껏 집에만 딱 한 번 올라갔었고, 형은 보지도 못한 채였으니까.
"정말 오랜만인데요.. 형보다는 형수님 보니까 더 반가워요~ 하하"
여행지를 놀러 온 사람을 인솔하는 분위기에선지 평소에 형수를 봐도 잘 말문을 안 열던 내가 초반부터 형수에게 아부를 하고 있었다.
"후훗. 저도 도련님 오랜만에 보니까 너무 반가운데요."
"자. 여기 있지 말고, 차로 가죠. 제가 멋진 차로 렌트 해놨어요."
주차장으로 빠져나와 내가 렌트를 해둔 차량의 앞으로 가자, 형 부부는 놀랍다는 듯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당연하겠지만 말이다. 내가 빌린 차는 컨버터블 오픈카인 벤틀리 컨티넬탈 GTC였다.
회사와 계약을 맺고 있는 렌트가 회사를 통해 50% 할인된 가격에 빌렸음에도 꽤 값이 나가는 차였고, 렌터카 회사에도 단 한 대밖에 없는 최고급 차량이었다.
형 부부의 일주일간 여행을 만끽하기 위한 특별 선물이라고 너스레를 떨었고, 형과 형수는 이미 감동한 표정이 그대로 표출됐다.
"뭐. 2인승으로 타야 딱 좋긴 한데 우선 나도 집에는 가야 하니까, 불편해도 형이 뒤에 타. 내가 운전할게."
"야! 선물이면 형이 운전해야지. 네가 운전하면 쓰겠냐."
"형은 길도 잘 모르잖아."
"내비게이션 없냐? 내비게이션 찍으면 되지."
"제주도 전용 내비게이션이 있어야 하는데, 이차는 기본 내비게이션이 안 달려있어서 가지러 가야 해."
별수가 없는 상황이라는 걸 파악한 듯 형은 볼멘 표정으로 뒷좌석으로 가서 비좁은 의자에 구부리듯 앉아 투덜대기 시작한다.
나는 운전석으로 가서 앉고 형수를 조수석에 태우고는 이내 고성능 차량의 속도를 만끽하며 운전을 시작했다.
제주공항 근방의 맛집으로 소문난 음식점에서 점심 식사를 간단히 하고는 516 도로를 타고 한라산 초입으로 향하는 곳 마을 근처에 나의 오피스텔 원룸이 있었다.
"형~ 잘 놀고, 이따금 전화하고, 재밌게 놀아."
"어. 그래, 아무튼 차 고맙다!"
"도련님. 고마워요. 중간에 한 번씩 들를게요. 같이 저녁 식사해요."
"네. 형수님. 즐겁게 보내세요."
형과 형수는 그렇게 차를 타고 둘만의 여행을 떠나기 위해 내 시야 멀리 사라져갔다.
형수가 섭지코지를 가장 보고 싶다고 했으니 오늘은 동부 해안쯤에서 하루를 보낼 것이었다.
나도 여자가 있다면 정말 일주일 휴가 풀로 써서 형과 같은 여행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구 생각하면 뭐 하냐. 누구는 주말 즐겁게 보내는데, 나는 또 지금부터 방바닥을 긁어야겠구나."
다음날, 오전에 형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성읍민속마을에 와있는데, 말을 타려고 하는데, 어디가 좋냐고 나에게 물어왔다.
솔직히 나도 제주도 와서 말을 타 본 적은 없었기 때문에 아무 데나 가라고 하려다가 그래도 아니다 싶어 책상으로 가서 인터넷 검색을 시작했다.
그리고 검색 결과에 따라 OO 승마클럽을 추천했고, 형은 고맙다고 하며 전화를 끊었다.
"아. 주말인데 같이 좀 놀자고 하면 안 되나?"
나도 참 어지간히 심심한가 보다.
그리고 다시 오후가 돼서 형에게 전화가 또 걸려 왔다.
"왜? 이번에는 또 어디 가려고?"
"민우야."
"왜?"
"형. 큰일 났다. 오늘 늦게라도 서울 올라가야 할 것 같다."
"뭐? 왜 갑자기?"
"형 회사에 일이 생겨서. 암튼 너희 집으로 지금 갈 테니까 가서 이야기하자."
형과 전화를 끊고 나는 안타까운 상황에 걱정하면서도 일면, 고소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못된 놈. 쩝.
2시간쯤 지났을까. 형이 집 앞에 도착하여 전화했고, 나의 원룸 안으로 들어왔다.
부부의 표정은 심각했다. 특히나 형수는 골이 잔뜩 나 있는 표정이었고, 형은 형수에게 얼마나 구박당했는지 안절부절못하면서 쩔쩔매고 있었다
.
승마클럽에서 즐겁게 승마를 마친 후, 형이 핸드폰을 확인했을 때는 회사의 이사로부터 전화가 수십 통이 걸려 왔었다고 했다.
통화를 하자 내일 오전 중소기업진흥공단으로부터 감사가 나온다는 이야기 했다고 했다.
형의 회사는 공단으로부터 매년 일정액의 지원금을 받고 있는데 이번 감사에서 지원금을 받는 회사 평가를 다시 하여 지원금을 없애거나 축소할 방침이라고 했고, 지원금을 받지 못하면 회사 운영에 엄청난 타격이 있어 서둘러 서울로 올라가야 할 상황이라고 했다.
"민우야. 부탁이 있는데."
"뭐?"
"감사가 이틀이라니까, 화요일 저녁에는 다시 내려올 수 있을 것 같다. 네가 그때까지 형수랑 좀 놀아주면 안 될까?"
"어어?"
"여보!! 무슨 소리예요. 그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도련님도 불편하실 텐데."
나보다 형수가 더 놀란 표정이었다.
아무리 가족관계라지만, 엄연히 남자와 여자는 유별하거늘. 형수와 시동생을 묶어서 둘이 따로 놀고 있으라니. 낯부끄러운 소리를 한다고 생각했다.
"뭐. 어때!!! 그렇다고 애써 만든 여행인데. 같이 올라가면 왠지 분위기도 망쳐서 다시 내려올 것 같지 않고, 네 형수가 아무래도 여기 있어야 내가 조금이라도 더 빨리 내려오려고 애쓸 거 아니냐. 네가 낮에 형수 무료하지 않게만 조금씩 놀아주면 되잖아. 응? 부탁한다."
"형. 아무리 그래도. 게다가 나도 출근도 해야 하고"
"여보. 그냥 같이 올라가요. 괜히 도련님 불편하게 하지 말고."
"야!! 네 형수가 불편해?"
"아.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거봐. 아니라잖아. 유진(형수이름)아 여기서 이틀만 기다려. 내가 금방 끝내고 내려올게.]
"여보."
둘의 이야기를 듣던 중 나는 점점 둘의 분위기가 안 좋아지는 것을 느껴 나도 모르게 생각지도 않았던 말을 내뱉고 말았다.
"형수님. 형 말대로 하세요. 제가 휴가라도 내서 이틀 동안 그냥 여기저기 구경시켜드리고 하죠. 뭐. 이틀. 생각보다 금방 갈 건데요. 뭐."
"그래. 민우야. 고맙다. 유진아. 그렇게 해. 금방하고 다시 와서 재밌게 놀자. 응?"
"여보."
그리하여 결국 형은 형수를 설득하고 밤 9시 비행기를 타고 홀로 서울로 올라갔다.
올라가기 전 다 같이 먹는 식사 자리에서는 차가운 기류에 소화도 제대로 되지 않아 속이 답답해 죽는 줄만 알았다.
형이 서울로 올라가고 우선 오늘은 저녁이 야심했던 관계로 형 부부가 예약해 두었던 호텔로 향했다.
여자 혼자 호텔에 투숙하는 게 조금 꺼림칙하긴 했지만 그래도 나랑 같이 잘 수는 없는 노릇이니 어쩔 수 없이 형수를 호텔 방에 모셔다 주었다.
"안녕히 주무시고, 제가 내일 아침 일찍 회사 출근해서 휴가원 내고 다시 올게요. 아마 여기 오면 12시쯤 될 테니까 오전은 푹 쉬시고, 점심 같이 들어요."
"네. 도련님 고마워요."
"그럼 가볼게요."
나는 내일 약속을 하며 호텔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