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 상열지사-6
환관 상열지사-6
“네?”
여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상 밖의 이야기를 들은 까닭이었다.
실은 여희는 단단히 각오하고 있던 참이었다.
낮밤으로 한다고 했으니 오늘 밤에는 아예 작정하고 수윤이 제게 덤빌 줄 알고 단단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이 사내가 뜬금없이 밤나들이를 가자고 한 것이다.
“통금은.”
“오늘은 정월 대보름이요.”
“네?”
“일 년 중에서 유일하게 통금이 없는 밤이라는 것을 모르오?”
“저는 모르는.”
통금이 없는 밤? 일 년 중 유일하게 통금이 없는 그런 밤?
밤에 나가 본 적이 없어서 여희는 그런 것은 모른다.
“오늘만큼은 통금이 없어서 한양의 밤이 무척이나 보기 좋은데, 함께 밤꾀꼬리나 갑시다.”
“밤꾀꼬리요?”
“야시장을 그리 부른다오.”
“야시장.”
야시장이라는 말에 여희의 얼굴이 발그레 물들었다.
밤에 열리는 시장은 얼마나 신기할까.
“좋아할 줄 알았소.”
날을 딱 맞췄다. 임금이 준 사흘의 말미와 혼인 날짜를 딱 정월 대보름에 맞춘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더 가까워지라고 하늘이 이렇게 날을 정해 준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면 뭘 챙겨야 하나요?”
“내 손만 잡으면 되는데 챙기긴 뭘 챙기려고.”
눈웃음을 짓는 수윤 때문에 여희의 얼굴이 사과처럼 달아오른 것은 안 봐도 뻔했다.
그렇게 어제 혼인한 남녀가 오늘 밤, 보름달이 휘영청 밝은 정월 대보름의 밤에 밤 나들이에 나섰다.
피맛골 쪽 야시장이 그리 흥하다며, 예전 검계 시절에 그쪽으로 자주 다녀 봤다는 사내 수윤의 손에 이끌려 장옷도 걸치지 않은 채로 여희가 밤 나들이를 나섰다.
태어나서 처음인 밤 나들이였다.
퍽-!
화살이 나무 과녁의 정중앙을 파고들었다. 과녁 중앙만 얼마나 맞혔는지 그 부분이 너덜거렸다.
“실력이 좋으시오. 이 장사를 여러 해 해 왔는데 이렇게 잘 쏘는 분은 처음이오.”
장사꾼 사내가 혀를 내두르며 과녁에 박힌 화살을 뽑았다.
손님의 화살이 과녁을 벗어나야 돈벌이가 되는 법인데, 이렇게 빗나가지도 않고 잘도 쏴대는 손님만 오면 이 장사는 망하게 될 것이 뻔했다.
빨리 다른 곳으로 가 주기를 바라며 장사꾼이 상품으로 걸어 놓았던 팔찌 여러 개를 내보였다.
“마음에 드는 것으로 고르시오.”
빨리 고르고 다른 데로 가 버리라고! 그게 장사꾼의 속마음이었다.
그런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명궁의 실력을 보인 수윤이 여희에게 손짓했다.
“부인 좋은 것으로 고르시오.”
“저는 다 좋은데요?”
여희가 장사꾼이 내민 좌판을 들여다봤다.
여희는 장신구를 가져 본 적이 없다.
어제 시집올 때 예물로 받은 가락지가 처음 가져 본 장신구였다.
노리개도 옷에 달아 본 적이 없고 가락지나 귀걸이, 팔찌는 더더욱 가져 본 적이 없다.
그렇게 여유 있는 처지는 아니었다.
물론 김수윤은 상당한 재력가라 그가 그녀의 방에 가져다 놓은 패물함을 열어 봤더니 그 안에 산호와 옥으로 만든 노리개며 금가락지, 은가락지 그리고 금비녀까지 없는 것이 없었다.
이런 야시장의 싸구려 물건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값진 것들이었다.
그러나 여희의 눈에는 그 값비싼 패물보다는 이 좌판의 싸구려 장신구가 훨씬 더 곱게 보였다.
수윤이 저를 위해 과녁을 맞히고 선물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게 어울릴까요?”
여희가 하나를 집어 들자 수윤이 얼른 칭찬해 준다.
“잘 어울리오.”
이 사내는 제가 무엇을 집어 들든 어울린다고 말해 줄 준비가 된 사내라는 것을 여희도 안다.
“저는 밤에 이렇게 나와 본 적이 처음이에요.”
난생처음 한밤중에, 그것도 피맛골의 골목을 걸으며 여희가 아이처럼 좋아했다.
같이 걸으면서도 수윤은 간간이 그녀가 춥지 않을까 염려하며 그녀의 배자와 두루마기를 여며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머리에 쓴 아얌도 삐뚤어지기가 무섭게 수윤이 똑바로 씌워 주었다.
“이렇게 걷는 것도 좋지 않소?”
“좋아요. 대감께서도.”
“혼인을 했으니 대감 소리보다는 서방님이 낫지 않겠소?”
“.”
아직 여희는 수윤을 서방님이라고는 불러 보지 못했다.
대감보다는 서방님이 어감이 더 좋다.
“강요는 아니고, 그냥 편한 대로 불러도 좋소.”
편한 대로.
여희가 속으로 ‘서방님.’ 하고 한번 시험 삼아 불러 볼 때였다.
그녀의 시선이 사람들이 유난히 많이 모인 곳으로 쏠렸다.
“저건 뭡니까?”
여희가 손을 들어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모여들어 있는 곳을 가리켰다.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인 한 사람이 작은 그릇 세 개를 돗자리 위에 놓고 열심히 움직이고 있었고, 그 모습을 그곳을 둘러싼 사람들이 눈도 떼지 않고 집중해서 보고 있었다.
“야바위라는 것이오.”
“야바위요?”
“일종의 노름인데, 어느 그릇 안에 구슬이 있나 맞히는 것이오. 알아맞히면 건 판돈의 몇 배를 되돌려주는 그런 것이오.”
“몇 배나 돈을 돌려준다고요?”
“저것으로 돈을 번 사람은 없다오.”
“왜요?”
“저건 대부분, 아니 전부 사기니까 그렇소.”
“사기.”
“재빠르고 교묘하게 사람들의 눈을 속이는 잔재주를 부리는 것을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당해내겠소.”
수윤은 예전에 이 골목을 수도 없이 다녔다. 야바위꾼들이 어떻게 사람들을 속이는지 다 알고 있다.
야바위꾼들 뒤에는 검계가 있기 마련이다.
야바위꾼은 사람들을 속여 돈을 벌고, 검계는 그 돈을 다시 뜯어먹는다.
검계라는 것은 사람을 죽여 돈을 벌고, 한양 도성 안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에게 뒷돈을 뜯어서 제 배를 불린다.
그래서 수윤에게 있어서 검계였다는 과거는 결코 자랑거리가 아니다.
물론 수윤은 한 번도 남의 돈을 그런 식으로 강탈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사람들의 눈에는 다 똑같이 보일 것이다.
“한 번만 해 보면 안 될까요?”
“부인.”
이럴 줄 알았다. 저런 것을 처음 보는 사람은 누구든지 꼭 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수윤은 안다.
저런 사기는 아예 안 하는 것이 낫지만, 해 보고 싶다니 어쩔 수가 없다.
“재미 삼아 조금만 하시오.”
“네, 네. 그럼요, 그럼요.”
눈을 반짝이며 조금만 하겠다는 여희를 수윤은 실은 믿지 않는다.
한 번만 하겠다고 다들 말하지만, 진짜 한 번만 하고 손을 터는 사람을 수윤은 본 적이 없다.
노름이란 그런 것이 아닌가.
아쉽고 아쉬워서 손을 떼지 못하는 것.
하지만 딱히 걱정은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여차하면 자신이 도와주면 되기 때문이다.
“여기!”
여희가 손가락으로 가운데 그릇을 가리켰다.
그녀의 눈빛은 자신만만했다.
분명히 구슬이 든 그릇이 가운데로 가는 것을 똑똑히 봤기 때문이다.
“여기라고 하셨소?”
야바위꾼이 가운데 그릇을 들어 올리자 그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어머.”
여희가 깜짝 놀랐다.
분명 가운데 그릇에 구슬이 들어 있는 것을 봤다.
그런데 어디로 간 것일까?
“자, 자, 다들 돈을 걸어요, 돈을 걸어. 구슬이 있는 그릇을 맞히면 건 돈의 스무 배를 돌려줍니다. 스무 배요, 스무 배.”
야바위꾼이 다시 그릇이 든 그릇과 빈 그릇들을 이리저리 돌리기 시작했다.
여희가 수윤을 쳐다봤다.
그러자 수윤이 주머니 안에서 엽전 몇 개를 꺼내 그녀에게 주었다.
수윤이 준 엽전을 야바위꾼의 앞에 놓은 다음 여희가 다시 그릇을 뚫어지라 노려봤다.
‘왼쪽.’
이번에는 똑똑히 봤다.
“왼쪽!”
여희가 자신만만하게 소리쳤다.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며 수윤이 웃음을 삼켰다.
그녀가 정확히 봤다.
확실히 눈썰미가 좋다.
그릇들이 이리저리 어지럽게 돌아가고 있는 와중에 구슬이 들어 있는 그릇을 정확하게 찾아내고 다른 것과 헷갈리지 않았다.
‘하지만.’
하지만 야바위는 기본적으로 사기다.
눈썰미가 좋은 것으로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 말이오?”
야바위꾼이 히죽 웃으며 그릇을 들어 올렸다.
구슬은 왼쪽 그릇이 아니라 가운데 그릇에 들어 있었다.
“이상하다. 왜 틀렸지? 분명히 봤는데.”
여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가 수윤을 돌아보며 일어섰다.
“그만하려고 그러시오?”
“이미 두 번이나 잃은걸요. 돈을 더 잃을 수는 없어요.”
“돈은 얼마든지 있으니 하고 싶은 만큼 하시오.”
수윤은 주머니 안에 든 돈 전부를 오늘 밤 여희를 위해 사용할 마음이 충분하다.
하지만 여희의 생각은 그렇지 않아 보였다.
잃어버린 돈을 아까워하는 기색이 얼굴에 역력했다.
하지만 적어도 잃어버린 돈을 다시 따기 위해서 전 재산을 던져서 패가망신하는 짓은 하지 않으니 현명한 여자다.
한두 번은 호기심에 해 볼 수 있지만, 그걸 쉽게 털어 버릴 수 있는 사람은 적다.
그런데 이 여자는 미련이 남지만 털어 버리는 결단을 내렸다.
“그만하겠습니다. 돈을 이렇게 버리는 건 너무 아까워요.”
“한 번만 더 해 보시오.”
하지만 수윤은 이렇게 그만두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저 야바위꾼은 감히 자기 아내를 속였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여희가 실망하는 표정을 보는 것이 싫다.
여희의 얼굴을 시무룩하게 한 값을 치르게 할 생각으로 수윤이 돈주머니 안에서 은자 세 개를 꺼냈다.
그리고 야바위꾼의 앞에 뒀다.
엽전이 아니라 은자가 나오자 야바위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입은 의복을 보니 돈 좀 있는 양반이 분명했다.
오늘 한 몫 단단히 잡았다는 생각에 야바위꾼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나를 믿고 한 번만 더 해 보시오.”
수윤이 여희의 어깨를 잡아 돌려세웠다.
“자, 시작합니다. 두 눈 똑바로 뜨고 잘들 보세요. 돌아갑니다, 돌아갑니다.”
야바위꾼이 그릇을 돌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은자가 세 개나 걸렸다.
여희가 눈을 똑바로 뜨고 뚫어져라. 그릇을 노려봤다.
그리고 그릇이 멈추는 순간 여희는 확신했다.
구슬은 가운데 그릇에 있다.
“가운.”
가운데 그릇을 외치려고 할 때였다.
“부인.”
수윤의 손이 여희의 어깨를 꾹 눌렀다.
“네?”
“부인.”
수윤이 여희의 귓가에 아주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오른쪽 그릇이오.”
“네? 하지만.”
“오른쪽이오. 나를 믿어 보시오.”
제 눈으로 똑똑히 봤다.
구슬이 든 그릇은 가운데로 왔다.
그런데 왜 수윤은 오른쪽이라고 하는 것일까.
“.”
여희가 입술을 달싹였다.
가운데 그릇인데 수윤은 오른쪽이라고 말을 하니 어떻게 해야 좋을지 살짝 갈등하던 여희가 결단을 내렸다.
“오른쪽 그릇이요.”
그녀가 오른쪽 그릇을 가리키는 순간 야바위꾼 사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당황한 나머지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며 여희는 자신이 알아맞혔다는 것을 깨달았다.
수윤의 말대로 오른쪽이었다.
“빨리 열어 보시오.”
수윤이 사내를 재촉했다.
“끄으으.”
야바위꾼 사내가 진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그릇을 들어 올렸다.
구슬은 오른쪽 그릇 안에 들어 있었다.
“맞혔다! 제가 맞혔어요!”
수윤이 알려 줬다는 사실을 잠시 잊은 여희가 어린애처럼 기뻐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자, 은자의 스무 배를 주시오.”
기뻐하는 여희의 곁에서 수윤이 야바위꾼 사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야바위꾼 사내는 욕지거리를 중얼거리며 돈이 든 주머니를 내밀었다.
그건 아마도 그 사내가 오늘 밤에 번 전부에 그의 밑천까지 더한 것이 분명했다.
이 한 번으로 이 사내는 빈털터리가 된 것이다.
수윤은 그를 딱히 불쌍히 여기지 않았다.
오늘 밤 이 사내의 야바위 사기에 몇 명의, 아니 몇십 명의 사람들이 속아 넘어갔겠는가.
남의 돈을 부당하게 취한 값을 치르는 것뿐이다.
물론 수윤은 이 야바위를 통해 번 돈을 한 푼도 쓸 생각이 없다.
돌아가는 도중에 장통교를 지나게 되면 그 다리 아래에 움막을 짓고 사는 거지들에게 이 돈주머니를 주고 갈 생각이다.
“돌아갑시다.”
수윤이 여희의 손을 잡고 돌아섰다.
오늘 밤 남의 돈을 털려다 제 주머니가 털린 야바위꾼 사내가 분통이 터져 야바위판을 뒤엎는 소리를 들으며 수윤이 미소를 지었다.
저래 봤자 저 사내는 내일이면 어느 장터에서 또 누군가의 주머니를 야바위 사기로 털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수윤이 저 사내에게 동정심을 가지지 않는 이유였다.
“어떻게 알아내셨습니까?”
수윤과 걸으며 여희가 신기한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제가 보기에는 영락없이 가운데였는데 어떻게 알아내셨습니까?”
“속임수니까 알아차리기 쉽소.”
“속임수요?”
“야바위는 다 속임수요. 속임수를 정당한 방법으로 어떻게 이기겠소.”
“그러면.”
“가운데 그릇만 빼놓고 다른 두 개의 그릇 안에는 모두 구슬이 있었소. 그리고 가운데 그릇을 고르게끔 일부러 조금 느리게 그릇을 움직인 거요.”
“그런 방법이.”
“출출하지 않소?”
“조금 배가 고프긴 합니다.”
“그러면 이제 돌아가서 운심 누님에게 야식이나 차려 달라고 할까요?”
“이 밤에 운심 언니를 깨우는 것은 실례니까 제가 차려 드릴게요.”
“부인이요?”
“저도 음식을 잘한답니다.”
“아, 그랬었지. 그러면.”
“뭐가 드시고 싶으세요?”
“따뜻한 죽이 어떨까 하는데.”
“죽은 제가 잘하는 것 중의 하나예요. 쌀이 부족하면 항상 죽을 끓였거든요.”
“저런.”
수윤이 여희를 쳐다봤다.
여희의 모친을 통해서 그녀가 가난하게 살았다는 것은 이미 들었다.
그러나 죽이 일상이 될 정도로 가난했을 줄은 몰랐다.
“가난 때문에 딸을 두고 와서 계속 후회했답니다.”
양반의 아내였던 그녀는 두고 온 딸을 내내 걱정했다.
어머니의 걱정을 수윤은 이해한다.
수윤의 모친도 항상 수윤을 그렇게 걱정했다.
마지막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어머니는 수윤을 걱정하기만 했다.
석 달 전, 수윤은 임금의 은밀한 명을 받들고 지방에 내려간 적이 있었다.
관찰사에게 은밀하게 전달해야 하는 임금의 밀지가 있었고, 누구도 믿고 맡길 수가 없었기 때문에 수윤이 직접 가지고 내려갔다.
하지만 도중에 역적의 무리에 둘러싸여 큰 상처를 입고 쓰러지고 말았다.
피를 너무 흘려 이젠 정말 죽었다고 생각했을 때 그녀에게서 도움을 받았다.
만약 그때 그 자리를 그녀가 지나가고 있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꼼짝없이 죽었을 것이다.
그녀는 마을 외곽에서 남의 집 빨래와 삯바느질 그리고 온갖 잡일을 해 주며 혼자 살아가고 있었다.
그녀의 집은 아주 초라했고, 그녀는 낡은 옷을 입고 살고 있었다.
그녀가 하는 일에 비해서 너무나 초라하게 사는 것을 보고 왜 그렇게 살고 있는지 물어봤을 때 그녀는 비로소 그녀의 아픈 문제를 꺼내 놓았다.
“가난이 원수라서 가족에게 보낼 돈을 벌러 여기까지 왔지만, 생각을 해 보니 내가 아무리 돈을 벌어서 집으로 보내도 바깥양반과 아들이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벌어서 보내는 돈이 무효라 돈을 보내는 것을 몇 년 전부터 그만뒀습니다.”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돈을 보내지 않고 논과 밭을 살 돈을 마련하게 되면 돌아가서 땅부터 살 생각입니다. 사람이 일단 제 손으로 부쳐 먹을 논과 밭이 있으면 그럭저럭 살 수 있으니까요.”
현명한 여자였다.
고생해서 손이 엉망이 되긴 했지만, 수윤이 보기에 그녀는 더없이 심성이 고운 여자였다.
그녀를 보며 수윤은 꼭 죽은 모친을 보는 것 같다고 여겼다.
몸이 회복될 때까지 그 집에서 며칠을 머물며 그녀의 숨겨진 사정에 대해 더 듣게 되었다.
그녀의 근심은 두고 온 딸이었다.
어린 딸에게 남편과 아들을 부탁하고 왔는데, 그것이 족쇄가 되어 딸이 괴롭게 살고 있지 않을까 근심하느라 얼굴이 어두웠다.
“남편과 아들이 너무 철이 없습니다. 돈을 아무리 많이 줘도 그들은 절대로 철이 들지 않을 거예요. 도무지 자기 손으로 일해서 땀을 흘릴 마음이 없고, 누가 먹여 살려 주기만을 바라고 있지요. 평생 그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살아갈 것인데. 그 속에서 제 딸이 시집도 못 가고 그 뒷바라지만 하게 될 것이 무섭습니다. 그 아이는 정말 착하고 영민한 아이인데.”
“제가 은혜를 갚고 싶습니다. 원하신다면 도성 안에 넓은 집을 사서 거기로 가족을 옮겨 가게 할 수 있습니다. 논과 밭도 사 드리고, 재물도 드릴 수 있습니다.”
수윤은 무엇이라도 줄 마음이 있었다.
목숨을 빚졌는데 뭘 못 주겠는가.
“아니요. 재물이 많아지면 남편과 아들은 더 게을러질 것이 뻔해요. 제 생각에는 그들은 죽을 고생을 해 봐야 정신을 차리겠지만, 그러면 딸도 고생이니. 딸만 어떻게.”
그때 그녀가 부탁했다.
“제 딸을 혹시.”
아마 그녀도 무거운 마음으로 부탁했을 것이다.
생면부지의 사내에게 딸과 혼인해 달라고 말할 때 그녀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자신이 그렇게 믿을 만해 보였던 것일까.
아니면 그렇게라도 해서 딸을 그 집에서 빼내 오고 싶었던 것일까.
“은혜를 아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 아니니, 제 딸을 그런 분께 부탁드리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녀의 대답은 그랬다.
수윤은 그녀의 집에서 며칠을 더 머무르며 그녀의 사람됨에 감탄했다.
그녀는 없는 살림에도 베풀 줄 알았고, 너그러웠으며 또한 다정했다.
그래서 그런 여자의 딸이라면 자기 아내로 맞이해도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때의 선택은 정말 탁월했다.
이렇게 다정하고, 아름다우며 또 매력적인 처녀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운이 좋은 것은 자신이다.
목숨을 빚졌고, 아름다운 아내까지 얻었다.
남들에게 베푼 것도 없는데 이렇게 받기만 하는 것이 여간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라 기회가 닿는 대로 베풀려고 노력 중이다.
사람은 받은 만큼 돌려줘야 하지 않겠는가.
사람에게는 각자의 그릇이 있다.
그릇이 채워지면 더는 욕심을 부리지 않아도 된다.
다 사용하지도 못할 것들을 욕심내어 그릇에 꽉꽉 채워 두면 뭐 하겠는가.
결국 흘러넘쳐서 자신도 쓰지 못하고 남도 쓰지 못하게 된다.
그러니까 버리기 전에 남들에게 베푸는 것이 낫다.
그러면 적어도, 혼자 웃는 것이 아니라 여럿이서 웃을 수 있게 되니 말이다.
이 혼담을 넣을 때 여희의 부친에게 벼슬을 약속했다.
하지만 수윤은 그 약속을 어길 생각이다.
수윤은 살아오면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약속을 어긴 적이 없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작정하고 약속을 어길 생각이다.
여희의 모친과, 그러니까 자신의 빙모와 한 약속 때문이다.
적어도 빙부와 처남이 정신을 차리게 하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사람은 고생해 봐야 정신을 차린다. 그것도 적당한 고생이 아니라 죽을 고생, 생고생.
수윤의 계획은 차근차근 진행 중이다.
머잖아 빙부와 처남은 혼인 예물로 받았던 꽤 많은 재물을 몽땅 탕진할 것이다.
수윤이 그렇게 계획을 짜 놓았다.
그리고 재물을 다 잃으면 자신을 찾아와 도와 달라고 하겠지만, 이미 운심을 비롯해서 집안 하인들에게 말해 놓았다.
누가 찾아와도 대문 안으로 들이지 말라고 말이다.
그들에게 벼슬을 줄 생각도, 시골 현감 자리를 내줄 생각도 없다.
그들이 정말 뉘우치고 살길을 찾아서 양반이라는 겉치레를 버리고 자신의 손으로 땀을 흘리며 먹고 사는 법을 배울 때까지는 말이다.
모질어도 그렇게 할 작정이다. 여희를 위해서, 그리고 생명의 은인인 빙모를 위해서.
다행스럽게 수윤은 모질어질 때 얼마든지 모질어질 수 있는 성격이다.
“제가 이곳 생활을 정리하고 올라가겠습니다.”
함께 가자고 여희의 모친에게 말했지만, 그녀는 그곳에서 일해 주기로 한 날짜를 채우고 오겠다고 했다.
돈을 떠나서 갑자기 일할 사람이 사라지면 다른 이들이 곤란해진다고 말하던 그녀는 책임감이 뛰어났고, 그녀의 딸인 여희도 그 성격을 쏙 빼닮았다.
“나는 잣죽을 좋아하오.”
“잣죽은 끓여 본 적이 없지만, 노력해 볼게요.”
“이런 말을 하기는 뭣하지만.”
수윤이 작게 웃으며 여희를 쳐다봤다.
“실은 내가 잣죽을 아주 잘 끓인다오.”
“네?”
“당신의 서방이 잣죽을 끓이는 것에는 또 일가견이 있어서, 내가 오늘 밤에는 부인을 위해서 잣죽을 끓여 볼까 하오.”
“하지만 서방님.”
“뭐, 사람들이 말하기로 사내가 그런 일을 하면 달린 고추가 떨어진다고 하지만, 나는 이미 환관이니 떨어질 고추고 뭐고 없으니 괜찮소.”
수윤이 하도 아무렇지 않게 말해서 여희는 당황할 틈도 없었다.
다만, 이 사내가 끓여 주는 잣죽이 무척이나 맛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그만 ‘그럼, 부탁드릴게요.’ 하고 말하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여희는 혼인 두 번째 날 밤에 서방에게 잣죽을 끓이게 한 것이다. 의도하지 않게 말이다.
다정하게 웃으며 걸어가던 중 먼저 걸음을 멈춘 것은 수윤이었다.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린 것이다.
“우리에게 볼일이라도 있나?”
여희의 손목을 잡으며 수윤이 서늘한 목소리로 뒤쪽에 서 있는 자들에게 말했다.
조금 전부터 계속 누가 따라오는 것을 느낀 수윤이었다.
돌아본 수윤이 자신들 뒤에 서 있는 사내들의 얼굴을 확인했다.
조금 전 야바위판에 둘러서서 구경하던 사내들이었다.
‘돈을 딴 것을 보고 갈취하러 왔군.’
이런 날에는 보통 저런 놈들도 돌아다니기 마련이다. 멀쩡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서 돈을 빼앗는 자들 말이다.
패거리를 짓고 다니지만, 실속은 없는 놈들이기도 하다.
“거, 돈 좀 나눠 가집시다.”
“돈을 많이 벌었으면 나눠 주고 그래야지.”
사내들은 저마다 손에 몽둥이를 쥐고 있었다. 얼굴은 하나같이 험상궂고 덩치들은 우락부락했다.
“서방님.”
겁먹은 여희가 얼른 수윤의 팔에 바짝 붙었다.
“돈을 나눠 주고 싶지만, 내가 나눠 주지 않아도 그렇게 궁색한 형편은 아닌 것처럼 보이는데? 그리고 사지가 멀쩡하면 누가 돈을 나눠 주기를 바라기 전에 스스로 땀을 흘려 버는 것이 어떨까?”
“이게 우리가 일하는 거라고.”
“그럼. 남의 돈 뺏는 것이 어디 쉬운가?”
사내들이 서로 낄낄거리며 웃어 댔다.
그 사내들을 수윤이 한심하다는 눈으로 쳐다보다가 저를 꽉 붙잡은 채 겁을 먹고 있는 여희를 바라보며 조용히 웃으며 속삭였다.
“부인.”
여희는 금방이라도 큰일이 날 것처럼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처음 나와 보는 밤거리에, 이런 건달들을 만난 것도 처음일 테니 당연히 무서울 것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부인을 겁먹게 한 것을 용서할 수 없다.
적당히 무시하고 갈 생각이었지만 수윤의 마음이 변했다. 저런 못된 것들은 혼이 나야 한다.
“뒤로 물러서 있어요.”
“하지만 서방님.”
“환관이 얼마나 주먹이 매운지 보여 드리리다. 당신의 서방은 비록 환관이지만 멀쩡하게 달린 사내들보다 훨씬 낫다는 것을 알려 드리지.”
수윤이 살짝 갓을 고쳐 썼다. 그리고 소매를 펄럭이며 사내들 앞으로 걸어갔다.
“내가 몸을 써 보지 않은 지 몇 달 만이라, 아마 주먹이 빗나갈 수도 있을 것이니 부디 양해를 부탁하고 싶어.”
“뭐라는 거야?”
“미쳤나?”
“허우대는 멀쩡해서 미쳤는가 보지? 아주 실성했나?”
수윤의 말에 사내들이 배를 잡고 웃었다. 그런 이들을 향해 수윤이 한 걸음 다가섰다.
“맞기 전에 먼저 알아 두어라.”
수윤이 사내들을 향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오늘 네놈들을 두들겨 패 주는 이 몸은 환관이시다.”
“뭐라는 거지?”
“환관?”
“내시라는 거 아냐?”
“좆도 안 달린 놈이 저러고 있는 건가?”
“허, 웃기지도 않구먼.”
수윤이 자신을 환관이라고 밝히자 사내들이 비웃기 시작했다. 그런 사내들을 수윤이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며 더 비웃었다.
“그래서 내가 불알이 달린 놈들을 아주 미워하지. 그런 이유로 누구든지 성질을 건드리면 불알부터 터트려 아주 사람 구실을 못 하게 하는 것이 취미니까, 불알을 지키고 싶은 놈은 물러나 얌전히 돌아가서 잠이나 자고, 나는 불알 따위 터지든 말든 상관없다는 놈은 덤비거라.”
너무나도 차분하게 말하는 수윤의 모습에 사내들이 반신반의했다.
별것도 아닌 것 같은데 단정하게 차려입고 말에는 조리가 있으며, 그리고 귀한 신분이 분명했다.
환관치고는 목소리도 굵고 체격도 좋다.
그러나 사내들에게는 수윤이 환관이든 아니든 그런 것은 상관없었다.
돈주머니만 빼앗으면 그만이고, 일단 상대는 한 명이라는 것이 중요했다.
자신들이 우르르 덤비면 한 명 정도는 식은 죽 먹기라고 생각했다.
그래,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어머나.”
여희가 감탄했다.
수윤이 놀라운 실력으로 여섯 명이나 되는 사내들을 단숨에 쓰러뜨렸기 때문이다.
사내들은 손에 몽둥이를 들고 있었지만 수윤은 맨손이었다.
그런데 길바닥에 떨어져 있는 나뭇가지를 손에 주워 들고 수윤은 너무나도 쉽고 빠르게 그 사내들을 전부 무릎 꿇렸다.
그런 다음에 그 사내들의 바지 중심을 꽉 쥐고 고환을 터트리려고 했다.
여섯 명의 사내 중에서 네 명이 자기들의 고환이 터지는 줄 알고 그 자리에서 기절했고, 나머지 두 명은 앞의 네 명의 고환을 터트리는 흉내를 내는 수윤을 보고 그 자리에서 기절했다.
아무리 센 척해도 고환이 터지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무조건 피해야 할 무서운 것이니 말이다.
“고환을 터트리려고 했지만 여기에는 내 부인도 있고, 내가 어제 겨우 혼인했기 때문에 평소에는 베풀지 않는 인정을 베풀어 주마. 너희들은 내일 아침이 밝을 때까지 이 거리를 다니며 땅에 떨어진 쓰레기들을 줍고, 모두가 돌아간 다음에는 이곳을 깨끗하게 해 놓거라. 그러면 내 특별히 너희들의 고환을 살려 주마.”
수윤의 목소리는 굉장히 근엄했기 때문에 여희는 그만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고환을 살려 준다는 말이 너무 우스웠다.
아니, 고환을 살려 주다니.
나오려는 웃음을 애써 참고 있으려니 수윤이 돌아봤다.
그리고 살며시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웃지 마시오. 지금 진지한 훈계를 하는 중인데.”
“아, 네, 네. 푸흡!”
그 진지한 표정에 여희가 기어이 웃음을 터트렸다.
“어허.”
수윤의 혀 차는 소리를 들으면서 여희의 웃음소리가 더 커졌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하여 한 번씩 기웃거리는 것이 더 우스웠다.
여희는 봇물이 터진 것처럼 웃었다.
한번 웃어 대니 도무지 웃음이 멎지 않았다.
웃음이 또 웃음을 부르고, 그 웃음이 배 속 깊은 곳에서 웃음을 끌어 올려 결국에는 웃다가 숨이 넘어가기 직전에 겨우 그쳤지만,
“히끅.”
그만 딸꾹질이 시작되고 말았다.
“히끅, 히끅.”
또다시 딸꾹질하는 그녀를 보며 수윤이 이번에는 절대로 놀라게 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웃다가 딸꾹질했으니 그 웃은 만큼 딸꾹질을 하게 내버려 두려고 했지만,
“숨을 깊이 내쉬든가, 그래, 물. 물을 단번에 마시면.”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부인을 책임지는 것은 서방이니 말이다.
“누가 물 좀 한 바가지 주시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도움도 요청해 봤다가 결국은 무릎 꿇은 사내 중 한 명에게 물심부름을 시킨 것은 조금 후의 일이었다.
그렇게 야시장에서 맞는 여희의 첫 번째 정월 대보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여희의 생에서 가장 즐거운, 첫 번째로 즐거운 나들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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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 그 환관의 아내가 사는 법
“마님은 준비가 아직 덜 되셨을까요?”
일찌감치 준비를 마친 운심이 안채 쪽을 연신 들여다봤다.
“아무래도 시간이 조금 더 걸릴 듯하오.”
안채에서 나오며 운심에게 이쪽으로 오라 손짓한 여인은 다름 아닌 여희의 어머니였다.
여희의 어머니는 지난달에 한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남편과 아들에게는 한양으로 돌아왔다고 알리지 않고 곧장 김수윤 대감의 집으로 와서 그때부터 이 집에서 함께 살게 되었다.
굳이 혼자 살 수 있다는 그녀에게 김수윤이 같이 살자고 도움을 청한 것은 김수윤의 처가 임신을 한 까닭이다.
이제 막 임신 석 달 차에 들어서는 수윤의 처는 입덧이 심해서 그녀의 어머니가 만들어 주는 음식 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그런 이유로 여희의 어머니가 여희를 돌봐 주기 시작한 지 이제 열흘 정도 되었다.
정월에 이 집에 여희가 시집을 왔고, 이제 단오가 되었으니 시간은 꽤 지났다.
지금 여희의 모친과 운심은 함께 외출해야 하는 여희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의 외출 목적은 단오 그네를 타는 일이다.
여희가 한 달 전부터 단오 그네를 꼭 타고 싶다고 계속 수윤을 조른 것이다.
그네를 타다가 떨어지기라도 하면 태중의 아이가 큰일 난다고 수윤이 몇 번이나 말렸지만, 여희는 꼭 타고 싶다고, 떨어지지 않겠다고 그렇게 약속했다.
하지만 떨어지지 않는다고 스스로 약속했다 하여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사고는 한순간의 실수로도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희를 절대로 이기지 못하는 사내가 수윤인지라 결국은 수윤이 여희의 그네 타기를 허락했는데 조건이 붙었다.
그 조건인즉슨, 같이 타기다.
하나의 그네에 수윤 자신과 여희가 같이 타는 조건으로 허락했다.
그리고 여희의 단오 첫 그네를 위해 수윤은 오늘 임금에게 간청하여 특별히 하루 말미까지 얻었다.
오늘 하루는 온전히 여희를 위한 단오가 될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단오 그네 터를 향해 출발해야 하는데 아직 수윤도, 여희도 나오지 않고 있다.
단장은 벌써 끝났을 텐데 왜 이렇게 뜸을 들이는지 운심이 고개를 갸웃거릴 때 여희의 모친이 조용히 귓가에 속삭였다.
“한 시간은 걸릴 것 같소.”
“네?”
“또 시작했소.”
“아.”
또 시작했다는 말을 운심이 단번에 알아들었다.
혼례를 올린 지 시간이 꽤 흘렀는데도 어떻게 된 것인지 매일 초야를 치르는 저 두 사람에 대해 이제 운심도 손을 놓았다.
처음에는 하도 내외를 하는 분위기이기에 운심이 중간에 다리를 놓고 별짓을 다 했지만, 지금은 알아서 잘하고 있는 두 사람이다.
얼마나 깨가 쏟아지는 부부인가 하면, 예전에는 일벌레처럼 궁궐에서 살면서 집에는 열흘에 한 번, 스무날에 한 번, 바쁠 때는 한 달에 한 번 돌아오던 수윤이 이제는 매일 돌아오고 있다.
장번 내시가 매일 대전을 비우면 어떻게 하냐고 물어봤더니, 임금에게 협박했다고 하더라.
매일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장하지 못하면 상선 직을 내려놓고 궐을 나가 그냥 유유자적 한량처럼 살겠다고 협박 아닌 협박을 하니 임금이 몸이 달아 그러면 낮에는 곁에 있고 밤에만 집에 돌아가라는 절충안을 내놓았고, 그렇게 하여 김수윤은 대전 장번 내시이면서도 일반 내시들처럼 매일 출퇴근을 하게 되었다.
임금의 편애가 확실하지만, 누가 감히 뭐라고 하겠는가.
임금이 좋다고 허락했고, 임금의 총애를 받는 이가 김수윤인 것을.
그리고 요상하고 이상하고 신묘한 일이 하나 또 생겼는데, 그것은 바로 김수윤의 처가 임신을 한 것이다.
환관의 처가 임신했다.
하늘이 요동해도 그런 일이 가능할까 모르겠지만, 김수윤의 처가 임신한 직후에 조정에서 말이 나왔다.
과연 김수윤은 정말 환관인가.
정말 고자가 맞는가.
그의 물건이 정말 제구실을 못 하는 것인가.
이런저런 말들이 쏟아져 나올 때 임금이 한마디를 했다.
“그럼 벗기고 확인을 해 보든가.”
그러면서 임금이 눈을 부릅뜨니 감히 김수윤의 바지를 벗겨 볼 수 있는 간이 큰 자가 없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김수윤의 처가 임신한 아이는 그 지극한 사랑에 감동한 하늘이 주신 기적이라고, 실상은 말도 안 되는 결론을 내며 훈훈한 미담 아닌 미담이 되고 말았다.
문제는 앞으로 그런 미담이 꽤 자주 일어날 것 같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 부부의 금실이 워낙에 좋아서 아이가 한 명으로 그치지 않을 것 같으니 말이다.
아이가 태어날 때마다 하늘의 감동으로 밀어붙여야 하니 벌써 임금은 머리가 아팠지만 어쩌겠는가.
김수윤이 없으면 곤란한 것은 임금이고, 김수윤은 아내만 끌어안고 있으니, 결국 임금은 땅을 치며 후회했다고 한다.
뭘?
김수윤이 장가들며 장가는 장가, 일은 일이라며 입궐해서 계속 일을 하겠다고 했을 때 그러는 법이 없다며 그에게 사흘 말미를 준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다고 한다.
그러지 않았으면 김수윤을 위해 미담 같은 것을 꾸며댈 필요가 없었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이미 엎어진 물이고, 건너간 강이니 그걸 어쩌겠는가.
아무리 ‘임아, 그 강을 건너지 마라.’라고 소리쳐 봤자 이미 김수윤은 건너오지 못할 강을 건너 아내의 치마폭에 싸여 버렸는데.
“읍, 읍, 흡, 읍.”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여희가 입술을 움직였다.
그녀의 뺨이 불룩했다.
그녀의 입 안에 가득 찬 것은 다름 아닌 수윤의 음경이다.
그리고 여희가 쥐고 있는 것은 수윤의 고환이었다.
어렸을 때 개에게 물려 잘려 나갔다는 고환을 지금 여희가 열심히 주무르고 있는 중이었다.
점액질로 가득한 음경을 입에 물고 빨고 있을 때조차 수윤은 여희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손으로 그녀의 등과 어깨를 만지고, 그 어깨를 물어뜯으며 그녀의 흥분을 돋우었다.
“읍, 흡, 읍.”
제 입 안에 가득 들어찬 수윤의 음경을 빨며 여희가 들어 올린 엉덩이를 흔들었다.
“읍, 흐읍!”
더는 참지 못한 수윤이 그녀에게로 허리를 흔들자 음경이 그녀의 목구멍 안쪽까지 미끄러져 들어왔다.
“하읍, 읍, 읍!”
음경이 굵고 큰 탓에 벌어진 입이 뻐근하니 아팠지만, 여희는 빠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하읍! 하!”
마침내 여희가 입에 든 것을 뱉어냈다.
그리고 가쁜 숨을 헐떡였다.
수윤의 음경이 여희의 눈앞에서 그녀의 타액을 흠뻑 뒤집어쓰고 꿈틀거리고 있었다.
“내가 고백했는데 부인이 자는 바람에 못 들은 거요.”
그날, 정월 대보름의 야시장에서 돌아온 직후 죽을 끓여 준 후에 수윤은 도저히 음심을 참지 못하고 바지 안에서 음경을 빼내 들었다.
그 발기한 음경을 보고 기겁하는 여희에게 수윤은 자신이 설명을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하소연했다.
입이 아프게 설명했는데 목간통 안에서 자는 바람에 못 들은 사람 잘못이라며 말이다.
결국 그날 수윤은 처음부터 다시 설명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 설명에 덧붙여 그녀의 어머니 이야기까지 해 버렸다.
그날 여희는 결국 수윤이 끓인 죽은 먹지 못했다.
죽을 먹는 대신에 다른 것을 먹었기 때문이다.
수윤은 그날 참고 참았던 것을 여희의 안에 잔뜩 쏟아냈고, 여희는 그런 것으로도 배가 부를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나중에 수윤이 그와 혼인한 것이 행복하냐고 물어봤을 때 여희는 대답 대신 웃어 줬으니 그게 열 마디 대답보다 더 수윤을 만족스럽게 했다.
“딱 십 년만 더 환관 노릇을 하겠다고 약속하겠소.”
수윤은 여희에게 그렇게 약속했다.
“주상 전하께는 아직 내가 더 필요하시니, 내가 필요 없어질 때까지만 환관 노릇을 하겠다고 말이오. 십 년이면 되지 않겠소. 그때까지만 환관의 처로 살아 주시오. 내가 많이 미안하오.”
수윤은 그렇게 사과했지만, 여희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환관의 처면 어떠하고, 누구의 처면 어떠할까. 김수윤이라는 사내의 처면 그녀는 족했다.
애초에 환관으로 알고 시집을 왔으니 그가 멀쩡한 물건을 달고 환관 노릇을 한다고 하여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어쩐지 환관치고는 너무 건장하다 싶었다.
환관치고는 다리에 털이 있다 싶었다.
환관치고는 그곳이 너무 불룩하다 싶었다.
환관치고는, 그래, 환관치고는 너무 사랑스럽다 싶었다.
세상에 이렇게 멋지고 사랑스러운 환관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세상에 이렇게 최고인 환관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아……!”
수윤이 여희의 몸을 이불 위로 쓰러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