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 상열지사-1
환관 상열지사-1
달그락.
쌀독의 뚜껑을 열어 보던 여희가 땅이 꺼질 것처럼 한숨을 내쉬었다.
“쌀이 떨어졌네.”
‘쌀’이라고 말을 하고 있지만 실은 쌀이 아니라 ‘보리쌀’이다.
“이를 어쩌나.”
바가지로 박박 긁어 봤자 겨우 한 움큼 정도가 바가지에 담길 뿐이다.
“감자가 몇 개나 있더라?”
찬장 안을 들여다보던 여희가 다시 한숨을 쉬었다.
소쿠리 안에는 겨우 감자 세 알이 있을 뿐이었다.
“오늘 아침밥을 차리면 먹을 것이 똑 떨어지겠네.
”
남아 있는 보리쌀과 감자 세 알로 밥을 해도 세 사람이 겨우 허기만 면할 정도밖에는 되지 않는다.
“점심은 어찌어찌 넘어가도 저녁은 어쩌지. 내일은 또 어쩌고.”
쌀을 꾸러 갈 데도 없다. 아니, 꾸러 갈 곳이 있다 하더라도 꾸러 갈 수는 없다.
양반 체면에 어떻게 남의 집에 쌀을 꾸러 간단 말인가.
양반은 얼어 죽어도 겻불을 쬐지 않고, 물에 빠져 죽어도 개헤엄은 안 치는 법이다.
양반에게는 체모가 있어서 아무리 빈궁해도 그 체모를 해치는 짓은 해서는 안 된다.
비록 가세가 기울어서 이제 쌀독에 보리쌀이 단 한 톨도 남아 있지 않고, 당장 아궁이에 들어갈 땔감이 없다고 해도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여희의 생각이 아니라 부친의 생각이다.
여희는 뭔가를 하고 싶어도 부친이 길길이 화를 내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남의 집 삯바느질이라도 하려고 하면 ‘양반이 어떻게!’라고 화를 내셨고, 부친 몰래 짚단을 얻어 와 짚신이라도 삼을라치면 ‘양반은 이런 짓을 하지 않는다!’라고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는 탓에 결국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여희의 조부는 장현 현감을 지냈다고 들었다.
물론 여희가 태어나기 전의 일이다.
여희의 조부는 저 멀리 어느 시골 장현이라는 고을의 현감을 십 년 넘게 지내며 꽤 많은 재물을 모았는데, 그 재물을 가지고 장현 시골을 떠나 한양의 벼슬자리를 얻으려다 사기를 당해 재물만 빼앗기고 장현 현감 자리도 내려놓았다.
소원인 한양에 올라오긴 했지만, 한양의 외곽에 작은 집 한 채를 얻는 것이 전부였다고 한다.
그 일로 인해서 화병이 난 조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떴고, 그 후에 여희의 아버지는 몇 번이나 과거를 봤지만 한 번도 급제하지 못하고 그저 소과에 붙어 진사 노릇을 하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진사 노릇을 한다고 해서 하늘에서 쌀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나마 남아 있던 재물과 손바닥만 한 땅까지 전부 야금야금 팔아먹으며 십몇 년을 버틴 것이 기적이었다.
그렇게나마 버틴 것은 조부가 뒤로 재물을 차곡차곡 쌓아 둔 까닭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팔아먹을 땅도 없고 숨겨 놓은 돈도 없다.
집 안에 내다 팔 만한 것은 전부 내다 팔았다.
하다못해 부친이 과거를 준비하며 읽던 책까지 닷새 전에 팔아 버렸다.
책을 팔아서 마련한 돈으로 산 보리쌀이 이제는 겨우 한 움큼 남았다.
“이제 더 팔 것도 없는데.”
여희의 가족은 부친과 아비를 닮아서 과거에 세 번 낙방한 오라비가 전부다.
부친과 오라비는 생활력이라고는 조금도 없다.
그나마 어머니가 계실 때는 상황이 조금 나았다.
그러나 어머니는 6년 전 집을 나가셨다.
양반의 체면 때문에 집을 나간 것이 아니라 ‘병이 들어 바깥출입을 못 한다’로 꾸미긴 했지만, 진실은 어머니가 집을 나간 것이다.
“이러다가는 다 굶어 죽겠어요. 나라도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 하는데, 한양에서는 양반 체면 때문에 일을 못 하니 제가 양반의 처인 것을 모르는 먼 곳으로 가서 돈을 벌어 올게요.”
그렇게 말하며 어머니는 집을 나가셨고, 처음에는 조금씩 돈을 보내왔다.
그러나 일 년 정도가 지난 후부터는 더는 돈을 보내오지 않으셨다.
여희의 짐작으로는 둘 중의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곳으로 재가했든가, 아니면 더는 이 지긋지긋한 가난에 얽매이기 싫어 이 집과 인연을 끊은 것. 그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원망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여희는 잘 안다.
누가 어머니를 원망하겠는가.
부친은 입만 열면 어머니를 탓하지만, 여희는 그런 아버지가 조금은 한심스럽다.
그러나 입 밖에 꺼내 말하지 못하는 것은 아버지는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안 되겠다. 혼이 날 때는 혼이 나더라도 일단 뭐라도 일을 해야겠어.”
이렇게 다 같이 얌전히 굶어 죽기만을 기다릴 수는 없다.
일단 무조건 저지르고 볼 생각을 여희가 은근히 속에 품었다.
“약방에서 약초 자르는 일을 해 볼 생각이 없냐고 했었지? 아직도 유효할까 몰라.”
며칠 전에 근처 약방에서 약초 자르는 잡일을 해 볼 생각이 없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품삯으로 하루에 보리쌀 석 되를 주겠다고 했다.
보리쌀 석 되면 적어도 굶지는 않는다.
“석 되를 받아서 두 되는 밥을 짓고 한 되로는 찬거리를 사고 그래야겠다.”
이것저것을 생각하며 아주 조금 남은 보리쌀로 밥을 짓기 위해 감자를 같이 담아 부엌 밖으로 나가려고 할 때였다.
“여희야! 여희야!”
과거에 떨어져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게으르게 지내던 오라비가 잔뜩 놀란 얼굴로 부엌으로로 걸어 들어왔다.
“여희야! 여희야!”
과거에 떨어져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게으르게 지내던 오라비가 잔뜩 놀란 얼굴로 정재로 걸어 들어왔다.
“꺅!”
그 바람에 보리쌀과 감자가 든 바구니를 놓칠 뻔한 여희가 얼른 뒤로 물러섰다.
“쌀을 쏟을 뻔했잖아요.”
“지금 쌀이 문제냐? 당장 나와 보거라.”
아니, 쌀이 문제가 아니면 뭐가 문제인데? 당장 밥을 지어서 아침을 먹어야 하는데 쌀이 문제가 아니라고?
집 안에서 온종일 빈둥거리며 놀고먹더니 머리가 이상해졌나?
놀면서 빈둥거리는 주제에 한 끼만 굶어도 죽겠다고 하는 인간이 쌀이 중요하지 않다고?
드디어 미친 건가 싶어서 여희가 제 오라비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실은 여희는 부친이나 오라비를 그렇게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이 정도로 궁지에 몰리면 뭐라도 하겠다고 해야 정상인데, 그 얼어 죽을 양반 체면 때문에 굶어 죽어도 아무것도 안 하겠다고 버티면서 또 엄살은 얼마나 심한지 모른다.
“여희야, 어미 말을 잘 들어라. 내가 집을 떠나면 앞으로는 네가 집을 책임져야 한다. 보내 주는 돈은 네가 관리하거라. 네 아버지나 오라비 손에 들어가면 아끼지도 않고 전부 써 버릴 거다. 네가 알뜰하게 사용하거라. 알겠지? 내가 없는 동안 아버지와 오라비를 부탁한다, 여희야.”
6년 전 어머니가 집을 나가며 그렇게 부탁한 까닭에 이 속 터질 것 같은 집을 나갈 수가 없다.
여희는 올해로 스물한 살이다. 어머니가 집을 나가던 6년 전에는 겨우 열다섯 살이었다.
어머니가 오죽했으면 부친과 오라비를 두고 열다섯 살 된 자신에게 집안을 부탁했을까.
어머니가 부탁한 것 때문에 여희는 못난 부친과 오라비를 책임지는 일을 그만둘 수가 없다.
돌아오지 않을 것 같지만, 그래도 언젠가 어머니가 돌아왔을 때 ‘잘했구나.’라는 말을 듣고 싶기 때문이다.
“대체 무슨 일인데.”
다짜고짜 자신의 손을 잡고 부엌을 나서는 오라비 선진의 뒤를 따라 걸어 나가던 여희의 눈이 커다랗게 변한 것은 그때였다.
작은 마당에 수레가 한 대 서 있었다.
못 보던 수레다. 그리고 수레 위에는 쌀가마가 실려 있었다.
그것도 한 가마가 아니라.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여섯 가마.”
여섯 가마. 저게 다 쌀은 아니겠지?
누가 일부러 모래를 담아 실어 온 것은 아니겠지?
놀라서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있던 여희가 손에 들고 있던 바가지를 땅에 소중하게 내려놓고 천천히 수레로 걸어갔다.
그리고 수레에 실려 있는 가마니의 안쪽을 살폈다.
“쌀, 쌀이야.”
가마니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보리쌀도 아닌 멥쌀이었다.
흰쌀. 백미. 비싼 것.
“오라버니, 이게 대체 무슨 일.”
여희가 놀란 눈을 크게 뜨고 오라비를 쳐다봤다.
어디서 훔쳐 온 것일까?
아니다. 그 정도 요령이 있는 인간이 아니다.
쌀 수레가 마당에 떡하니 있는 이 엄청난 상황에서도 양반이라고 뛰지 않고 천천히 걸어 들어온 것을 보라.
양반인데 설마 도둑질을 했겠는가. 그리고 수레를 무슨 수로 끌고 왔겠는가.
힘도 없다.
방 안에서 거의 나오지 않아 얼굴은 햇빛을 못 봐 누렇게 뜬 데다 기운은 하나도 없는 오라비가 무슨 수로 수레를 끄는 소도 없이 저걸 여기까지 가져왔을까.
저 수레는 틀림없이 다른 사람이 끌고 온 것이다.
“오라버니.”
“네게 혼담이 들어왔단다, 여희야.”
“네?”
아니, 쌀이 웬 쌀인가 물었더니 혼담이 들어왔다고 대답하다니. 이렇게 동문서답을 하니 과거에 낙방했지.
아침밥을 지어야 하지만 출처도 모르는 쌀에 손을 댈 수 없으니 일단은 마당에 쌀이 담긴 수레를 두고서 보리쌀에 감자를 섞어 밥을 지어야 한다는 사실이 슬퍼서 여희는 입맛만 다셨다.
“네? 혼담이요?”
여희가 두 번째 놀랐다. 방 안으로 들어가 부친의 앞에 앉자마자 부친이 혼담에 대해 말을 꺼냈기 때문이다.
오라비의 입에서 혼담이라는 말이 나왔을 때는 ‘무슨 헛소리?’ 이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지만, 부친도 똑같은 말을 하자 더는 이 혼담을 개소리, 아니 헛소리로 받아들일 수 없다.
“누가 혼담을 넣었다는 것입니까?”
설마 어느 미친 집에서 오라비에게 혼담을 넣었을까.
그럴 리는 없다.
제정신이 박힌 집이라면 정말 먹고 죽을 것도 없고 과거에 급제도 못 하고 빈둥거리고 놀고 있는 사내에게 누가 딸을 주겠는가.
오라비의 혼담은 아니다.
그러면 부친?
아니다.
어머니가 멀쩡하게 살아 있는데 혼담은 무슨.
그러면 남는 것은 여희 자신밖에 없다.
“설마…… 제게요?”
아니, 이런 가진 것도 없는 가난한 양반의 딸을 누가 며느리로 달라는 것일까?
그 이전에 자신이 시집가면 부친과 오라비는 굶어 죽지 않을까?
실은 굶어 죽는 것은 걱정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굶어 죽을 지경이 되면 시집간 딸에게 손을 내밀 부친과 오라비이기 때문이다.
“저어, 아버지. 저는 그다지.”
시집을 가기 싫다는 것이 아니라 시집을 가는 것이 무섭다.
부친과 오라비의 성격을 알아서 시집을 가는 것이 정말 꺼려졌다.
수레에 쌀을 실어 보내며 혼담을 넣는 집이라면 분명 재산이 꽤 있는 집일 것이다.
그런 집 며느리가 된다면, 부친과 오라비는 툭하면 찾아와서 돈이 없다, 쌀이 없다, 하며 손을 벌릴 것이 분명하다.
그러면 자신은 항상 시댁에 죄인처럼 굴어야 한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잖아.’
누가 시집을 그렇게 가고 싶을까.
“아버지, 저는 시집을 가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까 저 수레는 돌려 드리세요.”
여희가 제 대답을 똑똑히 말했다. 이런 것은 선을 확실히 그어야 한다.
“얘야, 여희야. 그러지 말고 내 말을 들어보거라. 대단한 분이 네게 혼담을 넣어 왔단다.”
“네?”
“네가 그분께 시집을 가면 그분께서 네 오라비의 벼슬자리도 알아봐 줄 수 있다고 하더구나. 생각해 보거라. 과거에 급제하기도 어려운데, 벼슬하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냐. 그런데 2, 3년 궁궐의 한직을 맡았다가 그 후에는 시골 현감 자리를 내줄 수 있다고 하니, 얘야, 이런 기회가 또 어디 있겠느냐.”
“대체 어떤 분이시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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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뭐라고? 벼슬자리를 내줄 수 있다고?
물론 과거를 치르지 않아도 벼슬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걸 여희도 모르는 것이 아니다.
원래 뒷돈이라는 것은 어디에나 통하는 법이라서, 뒷돈을 먹이고 벼슬자리를 얻는 경우도 많다고 들었다.
진사시에 겨우 급제한 다음에 돈을 뒤로 잔뜩 먹이고 시골 현감이 되는 사람도 종종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돈이 많거나 배경이 좋거나 둘 중의 하나다.
대체 어떤 사내이기에 오라비의 벼슬자리까지 마련해 주겠다고 하는 것일까.
“김수윤 대감이라는 분이시란다.”
“김수윤…… 대감이요?”
김수윤이라는 이름 석 자보다 ‘대감’이라는 호칭이 여희를 당황하게 했다.
아니, 대감이라고 부를 정도면 대체 나이가 몇 살이라는 거지?
예순 살? 일흔 살? 설마 여든 살은 아니겠지?
대감 정도 소리를 들으려면 영의정이나. 아니, 영의정은 너무 갔고, 병조판서나 그 비슷한 벼슬을 하고 있을 것이다.
수염이 허연 노인을 상상하며 여희가 주먹을 꽉 쥐었다.
‘나를 팔아서 입신양명하려고?’
이런 못된 가족을 보았나.
속에서 부아가 치미는 것을 여희는 애써 참았다.
옛말에 참을 인(忍) 세 개면 살인도 면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아버지, 아직 어머니도 돌아오지 않으셨어요. 혼인은 인륜지대사인데, 어머니가 안 계신 지금 혼례를 올려 버리면.”
“네 어머니도 좋아하실 거다. 이런 기회가 또 어디 있단 말이냐.”
이미 뭐라고 말해도 부친과 오라비는 아무것도 안 들리는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면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그래, 뭐가 궁금한 것이냐.”
“그분의 연세가 어떻게 됩니까?”
육십입니까, 칠십입니까? 설마 팔십은 아니지요? 그 말이 여희의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그래, 오십까지는 봐주자. 하지만 오십을 넘어서면 죽어도 이 혼인은 못 한다. 실은 오십도 싫지만 말이다.
“아직 젊지.”
“그래, 얼마나 젊은가요? 오십오세?”
“올해 서른이라고 들었지, 아마?”
“네?”
여희가 귀를 의심했다.
서른?
서른이라고?
나이 서른에 대감이라고?
대체 무슨 짓을 했기에 나이 서른에 대감이 되었을까?
역적인가? 아니지. 역적이면 대감이 아니라 목이 잘렸겠지.
“김수윤 대감은 말이다, 대전 장번 내시란다.”
“네?”
대전 장번 뭐라고?
“대전 장번 내시 김수윤 대감이라고 하신다.”
혹시나 여희가 잘못 들었을까 봐 부친이 또박또박 말해 줬다. 내시라고.
“아버지? 지금 농담하시는 겁니까? 내시와 어떻게 혼인을 한단 말입니까?”
내시는 그게 없잖아요, 그게.
여희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요즘 내시의 기준이 바뀌었나? 내시란 사내의 그것을 떼어 낸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여희가 내시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아니다. 내시는 다른 말로 환관이라고 하는 자들이다.
환관은 고환을 제거하거나 음경을 잘라 거세하고 궁궐에서 왕을 모시는 사내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고환과 음경을 제거한 탓에 사내 구실을 전혀 하지 못한다고 들었다.
그런데 고환도 음경도 없으면서 혼인한다고? 그것도 자신에게 혼담을 넣었다고?
“얘야, 내시들도 양자를 들이고 환처라고 해서 부인을 얻고 한단다. 생각해 보거라. 나이 젊지, 인물 좋지, 거기에 재물과 권세도 있지. 그만한 혼처를 어디 가서 찾겠느냐.”
‘밤일도 못 하고 말입니다.’
그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여희는 결국은 하지 못했다.
“혼자 살 것이지 뭐 하러 남의 딸을 데려다가 생과부를 만들려고 한답니까?”
“혼자 사니 적적하지 않겠느냐. 사람이 원래 혼자면 다 적적하고 그런 것이다. 김수윤 대감은 상감마마의 총애를 받아 서른 젊은 나이에 상선의 자리까지 오르신 분이니 그런 분과 혼사를 맺으면 우리 집안도 되살아날 것이다. 우리 집안이 돈과 권세가 없어서 이 지경이지, 돈과 권세만 있었으면 벌써 조선 팔도에 이름을 떨쳤을 거다.”
“그래도. 사내 구실을 못하 잖아요.”
“.”
여희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자기를 내시에게 팔고 그 대가로 단단히 뜯어낼 생각들인 것이 틀림없다.
‘인간일까? 양심은 있을까? 왜 이러는 걸까.’
별생각이 다 들었다.
“돈과 권세가 있으니 이제 남들처럼 가정을 꾸리려는 것이겠지. 얘야, 어중간한 혼처보다는 차라리 그 혼처가 낫단다.”
부친이 이렇게까지 나온다는 것은 기어이 관철하겠다는 뜻이다.
여기서 자신이 이 혼인을 못 하겠다고 우겨 봤자 통하지 않을 것이다.
‘내시라.’
고환과 음경이 없는 사내와 혼인이라니. 울어야 하나, 웃어야 하나.
나이는 젊다니 다행이지만, 내시라는 것은 고환과 음경만 없는 것이 아니라 털도 없다고 들었다.
그러니까 머리카락은 있지만 그 외의 털, 즉 수염이나 아랫부분에 털이 없어 민둥산 같다고 들었다.
‘망측하지 않을까?’
그런 것을 실제로 본다면 분명 충격적일 것이다.
‘사대부의 흉내를 내고 싶은 걸까? 남들에게 과시하려는 용도?’
그럴 수도 있다.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은 없지만, 아내를 얻고 양자를 들여서 남들처럼 있을 건 다 있다고 과시하려는 것일 수도 있다.
원래 사람은 아홉 개를 가지면 모자라는 하나를 더 가지고 싶어 하는 법이니 말이다.
‘어쩔 수 없지.’
여희도 체념했다.
‘이렇게 된 이상 밥이나 지어 먹자.’
그래. 어차피 이렇게 된 것, 수레에서 쌀을 내려 그것으로 밥이나 지어 먹자.
쌀을 가지고 나가서 고기로 바꿔 오자.
‘내 몸값으로 받는 거니까 실컷 먹어야지.’
쌀밥에 고깃국을 실컷 먹고 내시에게 시집을 가자.
여희는 그렇게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