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용실 여직원-상
미용실 여직원-상
탁탁탁 거리는 키보드 소리, 정확히 10시간째다.
남들은 다들 쉰다는 토요일에 출근해 아침 8시부터 나와 이 짓거리를 하고 있는 시간이 말이다.
아무도 없이 텅 빈 사무실에 혼자서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어서 그런지 소리가 오늘따라 유난히 더 크게 귓가에 맴돈다.
“씨발...”
절로 욕이 나온다. 여자 친구는커녕 집에 가면 날 반겨줄 가족 하나 없지만 그래도
토요일까지 출근시켜서 이렇게 일을 부려 먹는 건 정말 너무한 게 아닌가.
분명히 주5일이라고 계약하고 들어왔는데 말이다.
물론 이직하면서 말뿐인 계약일 거로 생각하고 들어오긴 했지만
그래도 6개월 내내 토요일 근무를 하루도 빠짐없이 시키는 건 정말 너무한 처사 같다 느껴진다.
그것도 언제나 나 혼자 출근.
아무래도 내가 호구인 거겠지.
다른 사람이라면 다 출근 안 하고 혼자 출근하라 하면 도저히 못 해 먹겠다고 말하고 나가든지,
담판을 짓든지 할 테니 말이다.
그런데 어쩌랴. 난 그런 배짱이 없다. 아니. 배짱을 부릴 수 없었다.
사회생활에 발을 들인지 5년 동안 정확히 6번 이직했다.
가는 곳마다 거의 1년을 채우지 못하고.
남들이라면 대리가 되고도 남을 경력이지만, 나처럼 토막 난 경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대리 대우를 받을 리가 없었고
6개월 전 나보다 3살 어린 대리에게 일 처리를 제대로 못 한다고 술자리에서 뺨을 맞는 모욕을 받으며 결국 참지 못하고 이직한 6번째 회사.
이 회사에서조차 쫓겨나거나 내 발로 나갈 순 없었다.
“아..인생 좆같다.....”
담배가 당긴다.
끊은 지 1년이 다 되어가는 담배가.
인생은 왜 이리 좆같은 것일까.
손에 들려 있는 볼펜을 만지작거리다 나도 모르게 볼펜을 입에 물었다.
“하....”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온다.
10년이 넘은 습관은 어쩔 수 없는 것인가. 끊은 지 1년이 되어가는데 습관적으로 입으로 가져가 물다니.
난 신경질적으로 볼펜을 책상 위로 집어 던지고, 오늘까지 끝내서 내일 오후 전에는 무조건 거래처에 넘기라는 품의서를 저장도 하지 않고 끄려다가 멈칫한다.
몇십억이 걸려있는 품의서인데 내가 보내지 않으면 난 아마 잘리겠지.
“하아...씨발...”
마음 같아선 당장 저장도 하지 않고 컴퓨터를 끄고 나가고 싶지만 그럴 순 없다.
좆같은 기분은 기분이고, 현실은 현실이니까.
“그래..내일 나와서 하자..내일...”
일요일 출근,
토요일 출근도 싫은데 죽기보다 하기 싫은 일요일 출근, 하지만 그 일요일 출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머리가 완전히 굳었는지 손이 완전히 굳었는지 더는 한 글자도 적기가 싫었으니까.
“가자..가..내일 나와서 하자...”
난 깊은 한숨과 함께 화면에 떠 있는 저장을 누르고 컴퓨터를 종료시켰다.
그리곤 사무실에 있는 불을 모두 끄고 완전히 꺼진 걸 확인한 후 조용히 가방을 챙겨 빠져나왔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공간에 울려 퍼지는 구두 발걸음 소리,
오늘도 나 혼자 왔다가 나 혼자 나가는구나. 처량하다. 지금 내 신세가.
오늘따라 날씨는 또 왜 이리도 좋은 건지..
여름이라 그런지 6시가 넘었는데도 밖은 대낮같이 환했고, 눈 부신 햇살 속에서 사람들은 하나 같이 연인이나 가족들과 함께 웃으면서 거리를 거닐고 있었다.
부럽다. 나도 저렇게 행복해하고 싶은데.
난 부질없는 생각에 사로잡혀 멍하니 바보처럼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다
씁쓸한 입맛을 다시며 회사 옆 건물 1층에 있는 편의점으로 들어가 10년을 나와 함께했던 담배를 사서 나와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이 근처 길거리는 거의 다 금연 구역이고 불시 단속을 자주 하는 곳이라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우다 과태료를 물지도 모르니까.
난 한참을 걸어 평소 타는 버스 정류장을 두 정거장이나 지나 인적이 드문 버스 정류장에 서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후우........”
오랜만에 느껴보는 기분 좋은 느낌..
순간, 이 좋은 걸 왜 끊었나 그런 생각이 든다.
나는 다시 한번 담배 연기를 몸속 깊숙이 빨아들였다 뱉으며 오랜만에 느껴보는 그 기분을 만끽했다.
잠깐이지만 느껴보는 행복. 그래, 그랬었던 것 같다.
늘 온종일 일에 치여 있다 잠깐 쉬면서 피우던 담배. 그 담배를 피우며 느꼈었던 그 감정. 아주 소박하지만, 행복하다는 그런 기분이었다.
그런데 담배를 끊고 1년 동안 단 한 번도 그런 기분을 느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내가 행복하다는 기분.
나는 다시 한번 그 기분을 만끽하고자 담배 연기를 깊숙이 들이마셨고, 있는 힘껏 내뿜는 순간 옆에서 콜록대는 소리와 함께 따가운 눈초리가 느껴진다.
그곳엔 여고생 2명이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서 있었고,
난, 마치 죄인이 된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슬금슬금 옆으로 걸어가
보도블록 위에 아직 한참 피우다 만 담배를 떨어트려 발로 비벼 끄곤 담배를 손에 집어 들었다.
“어휴 뭐야. 더럽게 바닥에 떨어트렸던 담배를 다시 피울 건가 봐. 손으로 집었어.”
“야. 그냥 쓰레기통 없어서 버릴 데 없어서 그런 걸 수도 있잖아.”
“아냐. 분명히..”
“작게 말해. 들려..”
그래 들린다. 그것도 아주 잘.
담배마저 내 맘대로 피울 수 없는 세상이라니. 씁쓸하다.
담뱃값은 좆나게 올랐던데. 그 세금으로 뭐 하는 건지 흡연자들 담배 피울 공간이나 좀 만들어주지.
담배 피울 데가 없어서 두 정거장이나 걸어와서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는데 그곳도 걸려서 이렇게 따가운 눈초리를 받아야 한다니..
흡연자는 설 곳이 없나 보다.
난 너무나 쓰디쓴 입맛을 다시며 마침 정류장으로 들어오는 버스에 올라탔고,
두 여고생은 내 눈치를 살피며 내가 타고나서 한참 뒤에 버스에 올라타서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계속해서 내 눈치를 살피며 한 번씩 내 쪽을 바라보는 여고생들.
‘그래..너희가 맞는 말 했어. 잘못 말한 거 없다고. 그러니 그만 좀 눈치 보면서 살펴봐라. 불편하니..’
진짜 하고 싶은 말을 차마 내뱉지 못하고 속으로 삭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고,
그러자 거짓말처럼 그 후 여고생들은 내 쪽을 바라보지 않았다. 나 혼자 그렇게 느낀 것인지 모르겠지만.
‘잠이나 자자...’
불편한 시선이 없어지자 일주일 동안 쌓인 피로가 몰려오며 난 그대로 기절하듯 잠들어버렸다.
30분을 달려 도착한 집 앞 정거장, 이젠 버스에서 자는 것이 워낙 익숙해 내리기 한 정거장 전이면 자동으로 눈이 떠졌고
오늘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한 정거장 전에 눈이 떠져 무사히 난 집 앞 정류장에서 내릴 수 있었다.
“아우...몸이 찌뿌둥하네...마사지나 받으러 가고 싶네...아....!”
순간 떠오르는 집 근처 단골 미용실,
서울 물가야 강남을 제외하곤 다 비슷비슷해서 그리 비싸지도 싸지도 않은 미용실이었지만
내가 이 근처로 이사 오고 2년 동안 같은 미용실에 가는 건 이유가 있었다.
그건 바로 원장의 두피 마사지 때문이었다.
나야 마사지에 대해 쥐뿔도 모르니 원장이 어디에서 배웠는지 안 배웠는지 그런 건 자세히 알 수 없었지만,
머리를 깎고 나서 샴푸를 해주며 해주시는 10분간의 두피 마사지와 함께 이어지는 어깨 마사지는
일상에 지친 나에게 피로회복제와 같은 것이며 꿀처럼 달콤한 시간이었다.
어차피 머리 손질한 지도 조금 시간이 지난 것 같고, 마침 마사지도 받고 싶었기에 난 곧장 단골 미용실로 향했다.
아직 7시를 조금 넘은 시간, 마감까지 충분한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문을 열고 들어가자 낯선 젊은 아가씨가 서 있었고, 난 잘못 들어왔나 싶어 다시 밖으로 나가 상호를 확인했다.
예전과 똑같은 상호.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난 영문을 몰라 멍하니 서 있었고, 그제야 머리를 하고 있던 젊은 아가씨가 날 향해 웃으며 물어온다.
“원장님 찾으세요?”
“아..네...”
“사장님 오늘 일이 생기셔서 출근 안 하셨는데.”
“아.....그렇군요..”
“제가 온 지 얼마 안 돼서. 단골이신가 봐요?”
“아니 뭐 단골까지는..”
“그럼 원장님 있을 때 오실래요? 주말은 이제 사장님 일 생기셔서 거의 못 나오시는데 평일에 오시면 원장님 있으시거든요”
난감하다. 요즘 평일에 거의 9시 이전에 마치는 시간이 없어서 평일에는 거의 올 수가 없는데..이제 원장이 주말마다 출근하지 않다니.!
유일하게 쉴 수 있었던 쉼터가 없어진다는 생각에 허탈함이 밀려온다. 이렇게 내가 쉬고 기대고 잠시나마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들이 하나씩 없어진다니.
좀 전에 있었던 담배 사건에 이어서 2연타로 충격이 밀려와서 그런지 난 넋을 잃고 멍하니 서 있었고,
그 사이에 머리를 하던 손님이 계산을 마치고 나갔고 젊은 아가씨가 나에게 다가왔다.
“저..손님 왜 그렇게...”
“네? 아..네..”
“머리하실 거면 앉으시고.”
“네..아..해야죠 네....”
일단 아쉬운 건 아쉬운 거고 거울에 비친 덥수룩한 내 모습을 보니 머리는 하고 가야 했기에 일단 난 의자에 앉았다.
“길게 안 자르실 거죠?”
“네. 살짝 손만 좀 봐주세요.”
“네. 보시다 더 자르고 싶으시면 말씀해주세요”
“네”
아가씨는 아직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지 원장의 여유 있는 표정과 다르게 잔뜩 경직된 표정으로 진지하게 내 머리를 커트하고 있었다.
싹둑싹둑 소리를 내며 잘려 나가는 머리들. 일정하게 소리가 들려와서 그런지 다시 잠이 쏟아진다.
원장이라면 한 번씩 나에게 말을 걸어줘서 이리 잠이 오지는 않을 텐데..
난 다시 한번 원장의 부재에 아쉬움을 느끼며 꿀잠에 빠져들었고, 아가씨의 다 됐다는 말에 뜨기 힘든 눈을 겨우 뜨며 일어났다.
“너무 곤히 주무셔서 말씀 못 드렸는데 머리 어떠신 거 같으세요?”
“네. 괜찮네요..”
아가씨는 괜찮다는 말에 살짝 미소 지었고, 그 순간 아가씨의 얼굴이 처음 눈에 들어왔다.
‘웃는 모습이 예쁘네. 아직 어려서 그런가.’
“이쪽으로 오세요”
난 익숙하게 아가씨를 따라가 의자에 누웠고, 아가씨는 내 머리에 살짝 오일을 바르기 시작했다.
“어. 아가씨도 두피 마사지할 줄 알아요?”
“아. 원래 그런 거 할 줄 몰랐는데. 원장님이 여기선 서비스로 꼭 해줘야 한다고 해서 원장님한테 배웠어요.”
“아. 그러시군요..”
다시는 이제 두피 마사지를 못 받을 줄 알았는데 아가씨가 배웠다는 말에 난 한결 기분이 좋아졌고,
아가씨는 비록 원장에 미치지는 못했지만, 정성껏 온 힘을 다해 두피와 어깨 마사지를 하고 있었다.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하는 마사지 효과, 일주일 내내 지끈거리며 날 괴롭히던 두통이 조금씩 사라지고 뭉쳤던 근육이 풀어지며 기분이 한결 나아지는 듯했다.
“오신 지 얼마 되지 않으신 것 치고 커트도 잘하고, 마사지도 잘하시네요..”
“말만이라도 고맙습니다”
“아니. 정말로요..”
난 정말 진심을 담은 칭찬이었고, 아가씨도 그걸 느꼈는지 아까와 다르게 활짝 웃어 보였다.
‘어..예쁘다..정말...’
순간 아가씨의 미소에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느낌과 함께 나도 모르게 설레고 있었다.
‘어. 이러면 안 돼. 나보다 한참 어린 거 같은데.’
하지만 어디 사람 마음이 이성적으로 제어할 수 있는가.
머릿속으로 안 된다는 외침과 달리 어느새 난 머리를 감겨주는 아가씨를 눈에서 하트가 튀어나올 듯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아...예쁘다..예뻐...’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마음. 한 번 사랑에 빠진 사람의 마음은 돌이킬 수가 없다.
특히 난 그랬다. 그래서 임자 있는 사람을 혼자서 좋아하며 끙끙 앓았던 일도 많았다.
좋아해서는 안 될 사람. 나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 마음을 쉽게 접기란 무척이나 힘들었고
그래서 그 돌이킬 수 없는 마음 때문에 늘 많은 상처를 받곤 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아마 그렇게 되겠지. 저렇게 예쁘고 어린 아가씨가 애인이 없을 리가 없으니까.
아니 있다고 하더라도 나 같은 사람을 거들떠보진 않겠지.
어느새 마사지에 이어 머리 감는 것까지 모두 끝나고 있었고 난 아쉬운 마음으로 아가씨의 안내에 따라 다시 의자로 돌아가 앉았다.
시끄럽게 울려 퍼지는 드라이기 소리...
하지만 그런 소리는 전혀 귀에 들어오지도 않고 내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만 귓가에 계속 맴도는 듯하다.
‘아..아쉽다....’
이렇게 빨리 끝나가는 시간이 아쉽다. 좀 더 미용실에 머물고 싶은데..
도무지 핑곗거리가 생각나지 않는다.
“머리 뭐 안 바르시죠?”
“네? 아..네..”
“다 됐습니다”
“네....”
나의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이미 나와 아가씨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모두 끝나고 있었고,
난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지폐 두 장을 아가씨에게 내밀었다.
아가씨는 돈을 받아 안으로 들어가 거스름돈을 가지고 나와 내 손에 쥐여줬고, 그 순간 아가씨와 아주 짧지만, 처음으로 직접적인 접촉을 할 수 있었다.
내 손을 스치듯이 지나가는 따스한 온기가 느껴지는 아가씨의 손..
“다음에 또 오세요~”
아마도 겉치레 성 인사겠지. 분명 그럴 텐데 오늘따라 저 말이 빈말로 들리지 않는다.
정말 다음에 또 와야 할 거 같은. 또 오면 날 반겨줄 거 같은..
물론 99% 나만의 상상일 거라 확신한다. 난 수많은 손님 중의 하나일 뿐일 테니까..
하지만 오늘만은 그냥 그런 착각에 빠지고 싶다.
착각이라도 좋으니. 그 설레는 기분을 만끽할 수 있게..
다음번에 내가 다시 방문하면 그녀가 날 향해 보여줬던 그 환한 웃음을 다시 지어줄 거로 생각하면서.
집으로 가는 길, 머릿속에 그녀의 모습이 자꾸 맴돈다.
오늘 있었던 수많은 우울한 일들, 그런 건 어느새 모조리 사라진 지 오래였고
난 바보처럼 실없이 웃으며 오랜만에 집에 가는 길에서 기분 좋은 설렘을 느끼고 있었다.
‘하아..늘 이런 기분으로 살 수 있었으면...’
그때 요란하게 울려대는 벨 소리, 모르는 번호다.
그런데 02나 070으로 시작하는 번호는 아니고..
스팸인지 스팸이 아닌지 반신반의하다 통화 버튼을 눌러 전화를 받았고 낯선 늙은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여보세요”
“네 말씀하세요”
“거기..김...김민수씨 휴대전화 아닙니까?”
“네. 맞는데요 누구신지.?”
“아이고..맞는구먼..저 다른 게 아니라 여기, 자네..자네 할아버지가 김동민 맞지?”
“네..그런데...”
순간 불길한 기운이 엄습한다. 제발 내 예감이 틀리길.
“동민이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아. 언제나 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언제나.
병원이며 장례식장이며 이야기하는데 하나도 들리지 않는다. 마치 음 소거가 된 거처럼.
이제 정말 이 세상에 나 혼자 남겨진 것인가. 정말 나 혼자.
내가 세 살 때 어머니는 집을 나가셨고, 난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손에서 자랐다. 어촌이었기에 아버지는 늘 배를 타고 고기를 잡으러 나갔고,
할아버지는 집 근처 텃밭에 농사를 지으면서 나를 돌보곤 했다.
그러다 내가 일곱 살이 되던 해 어느 여름날, 아버지는 언제나처럼 새벽 일찍 고기를 잡으러 바다에 나가셨고
그게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 되었다.
그 후 난 스무 살이 되던 해까지 할아버지의 손에 자랐고, 대학을 서울로 오면서 독립해서 쭉 혼자서 살게 됐다.
그런 나에게 할아버지는 아버지이자 어머니와 같은 존재였고, 유일하게 이 세상에 남겨진 나의 혈육이었다.
문득 이번 설 연휴 며칠 전에 마지막으로 할아버지와 통화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지난 추석에도 못 갔는데 이번에도 도저히 바빠서 못 내려가겠다고. 할아버지는 괜찮다고 건강이나 좀 신경 쓰라고.
작년 설에 보니까 너무 야위었다며 오히려 나를 걱정했다.
나는 늘 그렇듯 무뚝뚝하게 난 괜찮으니 할아버지 건강이나 신경 쓰라고 말했고,
할아버지는 통화 전 마지막으로 나에게 오래 못 보니 손주가 보고 싶다고. 한 번 큰마음 먹고 손주 보러 서울에 올라가야겠다고 말했다.
난 조금 한가해지면 올라오시라고. 서울 구경시켜드리겠다고 말했고. 할아버지는 알겠다고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으셨다.
6개월 전의 통화. 바빠서 그렇다는 구차한 핑계를 대면서 마지막으로 통화를 한 게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지난 설에 어떻게 해서든지 내려갈걸.
이럴 줄 알았으면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전화를 드릴걸.
뒤늦게 후회가 밀려온다. 뒤늦은 후회가..
참회의 눈물이 흘러내리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지금 와서 후회하고 눈물 흘려봤자 무슨 소용이랴. 떠난 사람은 말이 없는데...
가슴 한구석이 답답해 온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왜 난 이런 인생을 살아가는 것일까.
하지만 그런 슬픔을 누릴 여유조차 없다.
나에게 남은 마지막 혈육이 할아버지였고, 할아버지에게 남은 마지막 혈육도 내가 전부였다.
내가 상주이자 장례식을 챙겨야 하니 슬퍼할 여유도 나에겐 존재하지 않았다.
깊은 한숨과 함께 마음을 다잡고 난 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품의서는 보냈어?”
“아니..아직..”
“그럼 뭐?”
“저..할아버지가 돌아 가셔서..”
“아...그래? 그럼 품의서 오늘까지 마감하고 갔다 오면 되겠네”
“저..그게 오늘 내려가 봐야 할 거 같아서..”
“김민수 씨, 자네 형제나 가족 없어? 식은 식이고 일은 마무리하고 내려가야지. 이렇게 무책임하게 구는 경우가 어딨어?”
난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른 욕지거리를 겨우겨우 억누르며 차분히 심호흡을 했다.
“없습니다. 저 뿐이라...죄송합니다..”
“그래...? 하아..뭐 어쩔 수 없지. 품의서는 어디까지 작성했어? 아예 안 한 건 아니지?”
“네. 바탕화면에 제가 따로 저장해뒀습니다”
“그래 알았어. 자네한테 할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알겠는데 회사 규정에 따라 휴가는 3일 인 거 알지? 잘 갔다 오고”
“네..”
그렇게 팀장과의 전화를 끊고, 난 곧장 집으로 가서 최소한의 짐을 챙겨서 곧장 고향으로 내려갔다.
도착하니 밤 11시가 조금 넘은 시간, 난 전화를 주었던 그 분의 말씀대로 병원을 찾아갔고
이미 마련되어 있는 조촐한 장례식장에는 아까 전화를 주셨던 그 분인 듯 보이는 할아버지 혼자 쓸쓸히 장례식장을 지키고 있었다.
“어..민수가?”
“네..”
“아유..많이 컸네. 내 기억 못하겠지? 어릴 때는 한 번씩 너희 집에 가서 너한테 과자도 사주고 그랬는데. 정태 할아버지. 기억 안 나나?”
“아. 이제 좀 기억이 날 거 같네요.”
어렴풋이 떠오르는 기억,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한 번씩 우리 집에 와서 과자를 사주던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아직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어쩌다가.”
“뭐. 나이가 많잖아. 의사 양반 말로는 자연사라 하대. 자다가 심장 마비가 와서 죽은 게 사인이라 하는데. 우리 나이대면 그리 죽는 게 제일 낫긴 한데..”
정태 할아버지는 차마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고, 난 정태 할아버지의 손을 한 번 잡아드리곤 구석에 있는 삼베옷을 꺼내 입었다.
“신경 써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제는 제가 있을 테니까 할아버지는 그만 들어가서 쉬세요.”
“내 뭐 한 게 있다고..그래..어쨌든 네가 고생이 많네. 서울에서 여기까지 와서..”
“고생은요.”
“고생하고..내일 또 오마..”
정태 할아버지는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는지 한참을 할아버지의 사진을 보다가 천천히 발길을 옮겼다.
혼자 남은 장례식장..
천천히 피어오르는 향 연기, 할아버지 생전에 찍으셨던 영정 사진, 그리고 삼베옷을 입고 있는 내 모습..
이제야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조금씩 실감이 나기 시작한다.
할아버지가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이...
그때 들어오는 낯선 얼굴들. 할아버지가 아는 사람인 것 같은데
어릴 때 힘들었던 기억을 지우고 싶다는 생각을 늘 하고 살아서 그런지 도무지 누가 누군지 모르겠다.
저 사람들은 내 이름을 부르면서 아는데 말이다.
“민수 니 서울에 있다고?”
“네..”
“그래..고생이 많네..”
“아닙니다..”
두 명의 손님은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하고는 구석진 테이블에 앉아 음식과 함께 술을 기울였다.
“올해 동민 할아버지가 몇 살입니까?”
“보자..올해 여든다섯이네.”
“여든다섯? 나이 많네..”
“많지..”
“그러면 살 만큼 살았네..”
“그렇지. 거기에다 자다가 죽었으면. 그것만큼 편한 게 어딨노. 호상이지.”
“그러네! 호상이네 호상.”
호상. 호상이란 말이 머리에 계속 맴돈다.
호상이라. 잘 죽는 죽음이란 있을까. 그런 죽음이..
과연 우리 할아버지가 누릴 수 있는 복을 다 누리고 돌아가신 것일까.
평생 고생만 하다 가셨는데. 호상이라니..
장례식장에 와서 조금도 흘리지 않았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내가 조금 더 잘났다면. 정말 호상이란 말을 들을 수 있게..
할아버지에게 해 줄 수 있는 모든 걸 해 주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더라면.
이렇게 후회가 되지는 않을 텐데..
분명 저분들은 나쁜 의도로 말을 한 건 아닐 텐데 왜 이리 서러운 걸까.
왜 이리 슬픈 걸까.
끝도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 속에 상을 치르는 첫날이 지나가고 있었고.
그 후 난 마지막으로 할아버지를 배웅하고 한 줌의 재가 된 할아버지를 동해에 뿌리고 오는 날도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