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것과 살아지는 것
사는 것과 살아지는 것
어느 것부터 해야 좋을 지, 민기는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이제 곧 이어, 경찰들이 도착할테고, 경비 아저씨는 추락 현장을 제일 처음 목격한 자신을 경찰에 보고할 것이기에, 시간이 얼마 없음을 느끼고 있었다. 과연 경찰에게 자신이 목격한 사실에 대해서 구구절절이 상황을 묘사해야 할까, 아니면, 윤서의 말대로 이 자리를 우선 피하고 봐야할까, 판단이 제대로 서질 않았다. 만일 이 자리를 피한다면, 당연히 자신이 수사대상의 1번 타자로 의심을 살 것은 분명했고, 그 추락사의 원인이 살해라는 것으로 촛점이 모아진다 해도, 당연히 자신에게 의심의 화살이 돌아올 것은 뻔한 이치였다. 본능적으로 민기는 수중의 현찰을 되짚어 보았다. 상황이 어찌 되었던 간에, 윤서의 얘기를 믿어보는 수 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어떤 일이 진행되고 있는 것인지, 확인도 할 수는 없었지만, 윤서도 사라지고, 옆집의 여자는 살해당한 채로 추락했으며, 자신에게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은 그 촉박함을 더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민기는 지갑을 열어, 옷장에 넣어 두었던 비상용 현금을 챙겨 넣고는, 방을 나왔다. 이 새벽에 갈 곳이 어디 있을까 생각하는 도중,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삐삐가 다시 울렸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도중에, 1층에 머물고 있던 승강기가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옥상으로 가야겠네….)
민기는 본능적으로 그냥 승강기를 기다리고 있다가는, 경찰과 경비 아저씨를 정면에서 맞닥뜨릴 수도 있다는 생각에, 1층을 더 뛰어 올라가 옥상으로 향했다. 옥상 문을 열고 닫는 사이에, 쓔욱하는 소음과 동시에, 엘리베이터가 멈추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자신을 찾기 위해 경찰이 올라온 것으로 짐작 되었다. 옥상을 통해 다른 출구로 가는 사이, 지상에서 번쩍 거리는 순찰차의 경광등이 내려다 보였지만, 무슨 생각을 하고 자시고 할 여유는 없었다. 다른 통로를 통해, 승강기를 잡아타고 내려오니, 저절로 몸이 움츠러 들었다. 입구에서 부터 들리는 번잡한 소리와 사람들의 웅성대는 소리가 섞여서, 스스로 머리칼이 곤두서는 것 같은 긴장감을 느낄 수 밖에 없는 형국이었다. 그러나, 밖으로 나갔을 때,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이미, 경찰들의 일부분과 경비 아저씨가 자신의 예상대로 집을 향해 올라갔으며, 아파트의 앞마당은, 때 아닌 싸이렌 소리로 인해, 구경 나온 주민들과, 구급차의 소음으로 인해 번잡하기만 했다. 민기는 조용히 아무런 일도 없는 것처럼, 그 자리를 구경하는 척 하면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어디로 가야하지?)
민기는 제대로 상황 판단이 되질 않았다. 주머니에서 또다시 울리는 삐삐. 본능적으로 삐삐를 꺼내 살펴 보았다. 그건 병원에서 날라온 긴급 호출이었다. 시간을 너무도 지체해 버렸고, 어디에 있다고 연락도 날리지 않은 채로, 시간을 끌고 있으니, 병원에선 답답한 마음에 이다지도 연락을 여러번 때리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민기는 무작정 길거리를 걷다가, 손에 든 삐삐를 다시 주머니에 넣기 전에, 핸폰까지 꺼내 들었다. 이렇게 삐삐도 나의 위치를 파악해서 신호를 날릴 수 있는데, 소재지 파악 같은 기능으로, 켜 놓은 자신의 핸폰으로 인해, 위치가 발각될 수도 있다는 판단에서 였다. 나중에 긴요할 때 사용하리라는 생각으로, 삐삐와 핸폰의 베터리를 빼버렸다. 민기는 그런 자신의 행동에서 평범한 사람도 이런 위기에 봉착하면, 영화의 한장면 처럼 행동하게 될 수 밖에 없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걸어가는 눈 앞에 유일하게 빛나는 간판은, 찜질방의 네온사인 이었다. 아무리 수사의 가속을 더한다고 할지라도, 이 새벽에 근처의 찜질방을 뒤질 거라고는 판단할 수 없었다. 민기는 우선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라도, 찜질방에 들어가 마음을 가라앉히자고 생각했다.
(윤서는 어디에 있을까?)
이미, 찜질방의 내부는 고요한 정적이 흐르고 있었고, 저마다 깊은 잠들에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저멀리 건너편에 보이는 한 무더기의 남녀가 눈에 들어오고 있었지만, 여느 때처럼 자는 척을 하면서, 훔쳐 볼만한 심정적인 여유는 없었다. 잠에 떨어진 것이 아니라, 아마도 술에 곤드레가 된 듯한 여자를 사이에 두고, 양 쪽 옆에 들러 붙어, 잠이 든 것처럼 여자의 몸위로 다리를 걸치고 있는 두 남자의 손은, 어디론가로 기어 들어가 정신없이 꼼지럭대고들 있었다. 저러고서도 제대로 잠이 들 수 있을까하는 의문도 잠깐, 민기는 또다시 현실로 되돌아 오고 있었다.
(윤서는 어째서 나에게 그런 얘기를 남기고 사라진 것일까? 내가 주차장으로 내려가고, 추락한 여자를 살피는 그 짧은 사이, 윤서는 도망친 것일테고, 내가 집으로 올라간 사이, 윤서는 밑으로 내려와, 나처럼 빠져 나간걸 보면, 이미 그 자들이 집을 덮칠 것을 알고 있었다는 얘기인데…..그럼 그 자들은 또 뭐지? 윤서 같은 여자의 몸으로, 그런 살벌한 자들과 연관될 수 있는 끄나풀은 도대체 뭘까?)
민기는 갈수록 꼬리를 무는 의문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추적당할 수 있다는 얘기는 윤서를 쫓는 무리들이,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말도 되는데, 그럼 나도 윤서처럼, 쫓길 수 있는 상황에 놓인 거라는 얘기일까?…..)
그 때였다. 끄응하는 신음과 함께, 저 앞의 구석에 누워 있던 여자의 몸이 옆으로 틀어졌다. 어둑한 찜질방의 구석에서 벌어지는 두 남자의 윤간….그 옆에도 사람들이 누워서 자고는 있었지만, 모두들 그러려니 하면서 등을 돌리고, 짐짓 잠이 든 척을 하고는 있었지만, 다들 잠을 자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서로가 등뒤로 들리는 작은 소리에서, 그 음란한 분위기를 흠씬 느끼면서도, 죄책감조차 느끼질 못하는 그런 분위기…..이런 자리까지 놈팽이들을 끌고 왔을 시에는, 저것보다 더 심한 꼴을 당해도 싸다는 그네들만의 합리화와 당위성……이미 정신을 잃은 여자의 반바지는, 넓적다리 가까이 내려져 있었고, 멀리서도 여자의 보지를 넘나들었던 놈들의 손가락은, 이내 번들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여자의 양쪽에 누워 있던 놈중에 한 녀석이, 슬며시 일어나, 머리에 덮어 쓰고 있던 수건을 두 사람의 알궁둥이에 덮어주고, 자리를 뜨는 사이에, 뒤로 바지를 까내리고 있던 여자의 보지 사이에는, 성난 다른 놈팽이의 좇대가리가 뒤에서 쑤욱 쳐박혀, 파도를 타기 시작했다. 아마도 여자는 혼미스런 의식속에서도, 누군가 자신의 보지를 쑤셔주는 그 쾌감으로 인해, 꿈결에서조차 쾌감의 자락을 붙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을 것으로 보였다. 어둠 속에서도 확연히 들리는 그 척척대는 씹보지의 박수소리….. 어둠이라 할지라도, 그 음란한 소리는 빛처럼 잡아먹질 못하는 가 보다. 고개를 돌리려 해도, 민기는 귓가로 들리는 그 농익은 섹스의 비속음으로 인해, 어쩔 줄을 몰랐다.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이렇게 사면초가에 빠진 와중에서도, 저 놈들이 사라지면, 정신을 잃고 널부러진 저 노는 보지에 나라도 쑤셔볼 수 있을까 생각하고 있다니…… 내가 제 정신인감?)
민기는 자신의 머리를 쥐어 박았다. 오고갈데도 없이, 꼼짝없이 살인범으로 몰릴지도 모르는 지금의 상황이, 남의 일이겠거니 하면서, 한가로운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이, 한심스럽게 느껴지고 있었다.
(뭔 일이야 있을라구?)
민기는 그렇게 자신을 위로하고도 싶었다. 그러나, 이미 벌어진 사태는 쉽사리 해결될 조짐이 없어 보였다.
(아무래도 경찰에 가서 자수를 해야 좋지 않을까? 난 아무런 잘못도 없고, 그저, 일을 나가려다가, 재수없게도 추락의 전 과정을 목도한 잘못 밖에 없다고 하면, 별 탈 없을 수도 있지 않겠어? 무고한 민주 시민을,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을 무슨 수로 잡아 넣겠어?)
그러나, 한편으로 자취를 감춘 윤서를 생각해 보면 그렇지도 않았다. 만일 도움이나 보호가 필요했다면, 누구보다도 윤서 스스로가 경찰에 달려 갔을 터인데, 윤서는 민기에게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고, 신분이 노출될 만한, 그 어떤 행동도 하지 말라고 당부한 사실로 인해, 곤혹스러워 졌다.
(지금 병원은 난리가 났을텐데…..경찰이 나와 윤서의 신변을 확보하려고, 움직이기 시작했을테고….아참!)
그때서야, 민기는 앞집의 곳곳에 자신의 지문을 남기고 나왔음을 깨달았다. 바셔진 유리조각을 신발로 밟았던 기억하며, 바닥의 곳곳에 남아 있었을 자신의 족적,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만졌던 문고리와, 기억도 나질 않는 어둠 속의 벽과 가구들….자신의 실종도 문제 였겠으나, 마지막으로 그 집의 곳곳에 남아 있었을 자신의 지문은, 그 어떤 것으로도 변명이 되기에는 문제가 크다고 보였다. 그 어둠속의 남자들은 분명히 가죽장갑을 끼고 있었으니, 지문이 남질 않았을 것은 분명하고, 혼자 사는 그 여자의 집에 유달리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지문이 앞 집 사는, 사라진 남자의 것이라는 증거로만 들이대더라도, 자신의 변명은 이미 설득력을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이렇게 피해다니는 것도 한계가 있잖아? 갖고 있는 현찰을 다 쓰고나면, 그때는 또 어떻게 하지? 마냥 죄도 없이 윤서의 말만 믿고서 도피한다는 건, 아무래도 무모한 발상이 아닐까?)
살을 맞대고 살아온 부부 사이이지만, 이렇게 얼토당토 않은 상황에 빠지고 보니, 민기는 나라도 살아야 하질 않겠는가 하는, 비겁함에 빠지는 자신을 본다.
(그래, 날이 밝는대로 자수 하는 거야. 우선 잠을 자 두고, 정신을 가다듬은 다음에, 난 모르는 일이고, 우연히 추락의 현장에 있었던 잘못밖에 없었다고 하면, 별일이야 있을라구?)
민기는 이미 교대로 엉덩이에 수건을 두른 채, 거푸 차례로 여자의 보지를 쑤셔대는 놈팽이들의 난잡한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씨버럴 쇄끼들…..저렇게나 박고 싶으면, 방이나 따로 잡아서 대놓고 쑤시든가 허지, 왠 찜질방에서 한따까리는?)
팔짱을 끼고 웅크려 잠이 들어가는, 민기의 귓가에는 계속해서 질척대는 여자의 씹구녕이 연상되고 있었지만, 피로와 긴장이 풀려가며 몰려오는 잠을 막기에는 역부족 이었다.
‘툭!’
누군가 민기의 발목을 치고 지나가는 서슬에, 잠이 화들짝 깨고 말았다. 벌써 훤한 것으로 보아 아침인 것은 분명했다. 곳곳에서 아침을 먹는지, 음식냄새가 진동하고 있었고, 지난 밤사이, 눈 앞에서 씨근덕 대며, 공씹을 대주고 있던 그 여자도, 거푸 차례로 좇대가리를 놀려대던 놈팽이도 사라지고 없었으며, 자리 곳곳에 널려진 수건을 주워서 거두는 직원들의 모습만이 보이고 있었다.
‘아함! 잘 잤네….’
사람들은 언제나 그렇듯이 벽에 걸린 대형 TV에서 흘러 나오는 아침 뉴스를 건성으로 올려다 보면서, 건강에 별로 도움도 될 것 같질 않은, 아침 체조를 하고 있었다.
‘…..어젯밤, 사건 사고 소식 들어온 것이 있으면, 000리포터 전해주시죠……
……네, 그러니까 오늘 새벽 1시 30분경, 서울시 00구 0000동 00아파트 15층에 사는, 37세 0모여인이 추락하여 숨진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현재 검찰의 부검이 진행되고는 있으나, 유일한 목격자인, 앞집에 사는 0모씨와 그의 부인 0모씨가 잠적한 채로 연락이 두절되어, 추락 사고 상황에 대한, 목격자 증언을 들을 수 없는 관계로, 정확한 사고 원인은 밝혀지고 있질 않습니다. 하지만, 경찰 관계자와 인근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앞집에 살고 있던 0모씨와 이번에 추락으로 숨진 0모여인이 평소, 내연의 관계가 아니었나 하는 추측을 낳고 있는데요…….
…..어째서 그렇지요?.....
…….당 아파트 경비직원의 증언에 의하면, 추락 직후, 그 사실을 제일 첨으로 목격한 사람이 앞집에 사는 0모씨였고, 경찰이 도착하고 어수선한 와중에, 사고 상황에 대한 목격자 증언도 없이, 바로 도주한 사실 때문입니다. 경찰은 현재, 잠적한 앞집의 부부에 대한 신병을 확보하는데 주력하는 한편, 사망원인을 밝히기 위해 부검 결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또한 수사의 방향을 단순 추락 사고가 아닌, 두 사람 사이에 있을 수도 있는 원한과 치정에 얽힌 살인사건의 각도로도 수사의 방향을 잡고 있어서, 그 귀추가 주목되고 있습니다…….
…..어쨌든, 범죄 행위는 어떤 이유로도 용납될 수 없으며, 어서 빨리 범인은 잡히고, 쓸데없는 오해는 풀리기를 기대해 봅니다. 다음 소식은…..’
민기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 몇 시간 사이에 평소 안면식도 없어서, 얼굴조차 기억에도 없는 앞집 여자와 자신이 내연의 관계 어쩌구하는 상황으로, 뻥튀기 되어진 작금의 상황을 그냥 두고 보기에는, 분통이 터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래서는 안되겠어! 내가 나서서 결백을 밝히지 않는다면, 꼼짝없이 살인자의 누명을 쓸 게 뻔한데, 그냥 두고 보기에는…..)
그러나, 그 생각과 아울러, 아직 행방이 묘연한, 윤서의 얼굴이 떠올랐다.
(만일 나 만이 결백하다고 빠져 버리면, 혹시 윤서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아닐까?)
그것에 생각이 미치자, 민기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감이 안 서고 있었다. 대충 몸을 씻고, 찜질방을 나와도 딱히 갈 곳이 마땅칠 않았다. 병원과 부모님의 집에는 벌써 경찰들의 탐문이 시작 되었을 것이고, 밤사이 나타나질 않은 자신을 두고, 말들도 많았을 것이기에….. 그렇다고 핸폰에 베터리를 넣어, 어디고 자신의 결백을 알리고자 전화를 걸자니, 경찰의 추적의뢰로 인해, 소재지가 발각도 날 것 같아, 그 방법은 시간을 벌기에는 좋지 않을 것 같았다.
(어디로 간다지? 허….참….)
정말 갈 곳이 없었다. 직장과 집이라는 행방이 묘연해 지고 나니, 별로 갈 곳이 마땅칠 않은 자신을 되돌아 보면서, 너털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 넓은 세상 천지에 갈 곳이 없다니….그런 도중에도 민기는 자신과 앞집 여자를 내연의 관계로 엮어낸, 주변의 유치찬란한 상상력이 기가 막힐 따름 이었다.
(아! 그렇지!)
민기는 그제서야 갈 곳을 찾았다는 것처럼, 길거리의 택시를 잡아탔다.
‘아저씨, 대치동 00아파트요.’
민기는 이런 상황에서 염치없기는 하지만, 기댈 곳은 그 쪽 뿐이라는 생각을 했다. 택시를 타고 가면서도, 이 지경이 된 자신을 바로 보아줄런지도 알 수 없었지만…..
‘띵동’
‘………’
분명히 비디오 인터폰의 화면을 통해, 자신의 얼굴을 확인하고 있을 것이지만, 집 안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희진야….나 민기야…..안에 누구랑 같이 있질 않으면, 문 쫌 열어주지……응?’
‘……돌아가! 더 이상 그 좇같은 쌍판떼기, 보고 싶질 않으니….어서….’
‘희진아, 제발….부탁이다…..나….. 더 이상 갈 데가 없다. 여기 밖에는…….’
‘……..’
집 안에서는 칼칼한 여자의 음성이 비디오 인터폰의 스피커를 통해 흘러 나올 뿐, 문이 열릴 기미는 보이질 않고 있었다. 민기는 그녀의 그런 반응을, 예상이나 하고 있었던 것처럼, 문 앞에 기대어 한참을 그러고 서 있었다.
‘희진아…..나 그럼…..갈께…..미안하다…귀찮게 굴어서…….’
‘딸깍!’
그제서야 문이 열렸다. 그러나, 문 앞에 서 있을 걸로 알았던 그녀는, 이미 집 안으로 사라진 뒤였다. 민기는 머뭇대며, 현관 문을 닫았다. 아직까지 거실과 방으로 향하는 동선을 따라, 어지럽게 널려진 옷가지가 지난 밤의 흔적을 나타내주고 있었지만, 뭐라고 할 입장은 아니었다. 그 사이를 피해, 거실의 소파에 앉기는 했어도, 창밖을 쳐다보며, 목욕가운인 채로 담배를 피워 문 그녀는, 민기를 향해 고개조차 돌릴 줄 몰랐다.
‘이렇게 불쑥 낮부터 찾아와서 미안하다. 너 말고는 갈데가 마땅칠 않아서…..’
‘그래, 고작 여자 죽여놓고, 피할 곳이 여기 뿐이었니?’
‘아냐, 난 아냐! 난 아니라구. 뉴스에 난 걸, 다 믿는 건 아니겠지, 설마?’
‘왜? 나라구 설마가 사람 잡는 꼴 보지 말란 법 있다니? 그래, 그렇게 잘난 쌍판으로 돌아설때는 언제고, 이제는 나까지 공범을 만드려고, 죽상을 해서리, 뛰쳐 들어오는 이유나 들어보자. 그 째진 아가리로 한번 주절대 보시져?’
‘내가 안 죽였어. 내가 안 죽였다구!’
‘어이구 똥 싼 놈이 삐질댄다구, 어디서 악다구니야, 악다구니는? 성깔은 있어가지구…에이 쒸발….때가 어느땐데, 이 놈의 좇물은 질질대고 지랄이야? 싸재낀 지가 언젠데? 하여간 남자 쇄끼들이 하는 짓거리는 다 똑같다니깐…..’
그녀는 민기가 앞에 있는 것도 부끄럽지 않은지, 나체인 상태로 목욕까운의 앞을 열어제끼고, 가랭이를 벌리더니, 옆에 놓인 티슈를 쑥 뽑아, 보지와 가랭이 사이로 흐르는 좇물을 훌쳐 닦아 올렸다. 평소처럼 화끈한 그녀의 성격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그녀의 일면이었다. 그녀는 그랬다. 민기가 뺀질거리는 면상으로, 이제 그만 만나자고 했을 때도, 이유 불문하고서 쿨하게 돌아섰던 그녀….민기의 아이를 갖고 싶다고도 했고, 유부남인 것을 끝끝내 기어코 알아채고서도, 어느 하나 투정을 부릴 줄 몰랐던 그녀…….
‘그땐 내가 너무 잘못했다. 그렇게 끝을 내는 게 아니었는데…’
‘그렇게 끝을 안 냈으면, 뭐 이혼이라도 할 작정 이셨남? 입술에 침이락두 바르고 뻐꾸기 날리시져?’
‘그래도 희진이, 널 사랑 했었……’
‘너 아가리 닥치지 않을래? 어따대고 사랑타령은? 너 그러다, 여기서 바로 콩밥 자시러 쫓겨 나가는 수 있다?’
‘알았어. 알았다구….미안해….’
둘 사이에 싸한 냉기가 흘렀다. 민기는 그녀의 분이 아직 시푸르등등한 것이, 오히려 안심이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미움조차 사라져 있다면, 그것은 아무런 감정의 앙금도 없는 거라는 판단 때문에…..
‘윤서가 사라졌어…….그리고, 어찌된 영문인지, 나보고 어쩌란 것인지, 그저 숨어 있으라고만 하고서는…..’
‘다 듣기 싫고요. 언제 나갈 껀지나 말해, 어서…..나도 바쁜 몸인건 잘 알지? 보시다 시피, 쉴새없이 쑤셔주는 몽둥이도 가끔 찾아오고, 널 주구장창 숨겨줄 수도 없어, 알쥐?’
‘그럼….잠시만 있을께. 폐 안끼치고, 여차직하면 내 발로 걸어 나갈 테니까, 상황이 진정되는대로 며칠만……’
그녀는 다시 담배를 피워 물면서, 민기가 앉아 있는 탁자 위로, 들고 있던 담배갑을 집어 던졌다. 담배를 피워 무는 민기를 향해,
‘좇 같은 쇄끼, 여기가 어디라고 그 쌍판으로 기어 들어와, 기어 들어오긴…….’
한마디 내지르고, 방안으로 들어가, 문을 쾅하고 닫아 버리는 그녀의 서슬…..민기는 막막하기만 했다. 다시는 안 볼 것처럼 헤어진, 그 날의 순간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병원 홍보용 카탈로그를 찍는 도중에 알게 된, 기획사에서 의뢰한 전문 촬영기사 였다. 여자의 몸으로 그 바닥에서 꽤나 이름을 날리고 있던 그녀의 감수성은, 그 사진발에서 톡톡히 드러나고 있었고, 찢어진 청바지 사이로 보이는 다리 살결이 까무잡잡한 그녀의 모습에서 민기는, 윤서와는 다른 매력으로 인해, 관심이 깊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두달에 걸친 화보 촬영은 자연스럽게 두 사람이 같이 있는 시간을 만들어 주었고, 차 한 두잔, 식사 한 두번, 술 한 두 순배가 오가는 사이, 두 사람은 어느 사이엔가, 발가벗고 침대 위에 누워, 지나간 격정을 곱씹으며, 담배를 나누어 피우는 사이로 발전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와의 섹스에 있어서, 어떤 것도 문제 삼는 적이 없었다. 워낙 시간에 쫓기는 민기의 상황으로 인해, 긴밤을 보내는 것에는 일찌감치 미련을 접었던 그녀였고, 그녀 또한, 밀려 있는 슈팅 스케쥴과 스튜디오 촬영 일정으로 인해, 간만에 만나기도 빠듯한 두 사람의 상황 이었기에, 만나서 옷을 벗고, 애무도 없이, 시간에 쫓기는 섹스를 나누는 과정속에, 불평을 들이댈 만한 여지는 어디에고 없었다. 그러나, 민기는 그녀에게 점차 빠져들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고, 자유분망 하면서도, 휘몰아치는 열정이 항상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녀를, 어느 선에서 잘라내야 하는가에 조바심을 내는 지경에까지 가고야 만다. 그녀와의 만남에서 언제나 배제 되었던, 대화의 틈바구니를 건져 올려 들이댄, 유부남 타령…..그러나, 그녀는 헤어지자는 의미로 날렸던 민기의 의도적인 멘트를, 한마디로 일축했었다.
‘유부남 좇대가리도 좇은 좇인데….’
민기는 그녀의 호방함에 혀를 내둘렀다. 유부남 이란 것을 애저녁에 알고 있었다는, 이어진대답은 더우기 그의 기를 질리게 했지만, 쉽사리 그녀와의 밀회를 끊지도 못했다. 그럴 수록 그녀와의 밀회는 횟수를 늘려갔고, 더 이상 진행되었다가는 두 사람 모두에게 불행한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으로 인해, 민기는 그녀에게 기어이 고별을 전하지 않고는 어찌할 수 없다고까지 느끼게 된다. 그러나, 그 날도 민기는 그녀에게 보기좋게 당하였는데,
‘그 쌍판을 보아하니, 뭔 개똥같은 설레발 풀러 나온 게 분명허네……나 바쁘니까, 그냥 간딴히 허지?’
‘아니, 그러니까, 우리 둘 사이에….’
‘우리 둘 사이에 있긴 뭐가 있는데? 그 좇같은 미련 따우? 예끼 여보슈! 나 그렇게 민한 년 아니거덩여? 이쯤에서 보지 접어라 그말 아냐? 나 쒸발, 구걸 같은 거 않해. 갈테면 가. 어련 하겠니? 결혼한 쇄끼들 허는 짓거리가 그렇지 뭐. 공씹 따먹기 바쁘게, 토낄 생각만 허니, 어련 하겠어? 우리 집에 있는 니 잠옷이랑 빤쭈, 어떡허까? 찢어내 버릴까? 아님 태워 버릴까?’
‘…….’
그 당시에도 민기는 말을 못했다. 기총소사처럼 다다다다 해대며, 사라지는 그녀의 어깨에 둘러맨 사진장비가 무겁시리 보이기만 했던 그 오후……그렇게 헤어지고 이렇듯 언짢은 상황으로 마주하게 될 줄은 민기도, 그녀도 예상하지는 못했다. 방에서 문을 열고 그녀가 나오기까지, 민기는 멍하니, 거실에 걸린 자신의 흑백 나체 사진을 바라다 보고 있었다. 피곤에 지친 듯이, 엎드려 잠이 든 민기의 뒷 모습을 침대 위에서 잡은 듯한 그 흑백 사진….남자의 힢 곡선도 저렇게 매끈하게 잡아낼 줄 아는 그녀의 사진감각은 유달리 특별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커피 마실래?’
‘응. 주면 좋고…..’
어느정도 화가 가라앉은 듯한 그녀의 음성으로 인해, 민기도 대충 안심이 되고는 있었다.
‘어떻게 된거야?’
민기는 그 간의 일을 대강 털어 놓았다. 주머니에서 꺼낸, 윤서의 메모도 보여주자, 그녀조차 얼굴이 어두워지는 것을 민기도 알고는 있었다.
‘앞으로 어쩔건데? 아무런 잘못도 없다며? 윤서씨가 없어졌다고, 너까지 덩달아 이 짓거리 하고 다니다간, 제명에 못산다!’
‘나도 자수할까 어떨까 싶었는데, 윤서가 추적당할 수도 있다는 말에 께름직한 건 어쩔수가 없네.’
‘말이 추적이지, 공권력이 아닌 다음에야 그럴 능력이나 일반인들에게 있나?’
‘공권력?’
민기는 공권력이라는 말에 가슴이 뜨끔했다. 혹시 윤서가 해오던 일이 무슨 관련이라도? 그러나, 이내 그녀 앞에서 무거운 주제는 피해야 한다는 생각에 화제를 바로 바꾸었다.
‘요즘 사귀는 사람 있니?’
‘왜? 있으면 어쩌구, 또 없으면 어쩔껀데? 생각 있으믄 같이 와서 쑤셔 줄라구? 일없네…..한 좇대가리도 버거운 판에, 잊혀진 좇대가리 붙들고, 미련곰팅이 짓거리도, 이젠 싫증 난 지 오래야. 지금이 어느땐데…..’
‘결혼은 안 하구, 그냥 이렇게 살거니?’
‘왜 부조락두 허시게? 돈이 똥꾸녕에서 삐져 나오시나 보지? 하긴, 어련 하실라구?’
그녀의 툴툴거림은 아직 가시가 많이도 돋아 있었다.
‘나도 그렇지만 너도 사는 게 그렇게 좋아 보이진 않는다. 우리 두 사람, 마냥 좋아보일 나이는 이제 아니잖니?’
커피 잔을 내려놓고, 길게 연기를 내뿜는 그녀의 입술이 처량맞다는 느낌이 들고 있었다.
‘그 쇄끼도 그런 소리 하더라. 누님도 이렇게 궁상맞게 살지 말라허대. 누군들 씨발, 이렇게 살고 싶다니? 살다보니, 이런 팔짜로 살아지는 걸 낸들 어쩌라구……’
‘그래도 그렇지…..좋은 사람 만나서….’
‘좋은 사람? 좇까는 소리 하덜 말어. 넌 그럼 뭐니? 좋은 유부남? 웃긴다 너! 안보는 사이에 왠 훈계쪼? 이 세상에 좇대가리 달린 쇄끼들 치고, 공씹 앞에 좋은 쇄끼는 없어, 알간? 그저 노는 보지 줏어먹기 바쁜 세상에, 누가 좋고, 누가 나쁘고가 어드메 있다고…정신차려, 아쟈씨야! 자기 발등에 떨어진 불도 못끄는 주제비에 어따대고 훈장질은? 니가 내 인생 대신 살아줄 생각이나 있니? 그런 담에야 그런 소리 지껄여, 알간?’
민기는 그녀의 으름장에 찍소리도 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터프함에다 세상의 굴곡이 같이 겹쳐져, 이른바, 막 살아대는 그녀의 너울이 느껴지고 있어서, 서글픈 심정마저 우러나는 것을 내색하지는 못했다.
‘왜 또 그런 궁상맞은 쌍판?’
‘아냐, 사람 사는 게 다 그렇지, 내가 뭐 더 잘났다고 뭐라 할 수도 없는 거고…..’
‘안 본 사이에 도 많이 딲은 모냥이네?’
‘….왜 저 사진은 아직도 걸어놨니?’
‘……..’
온통 집안에는 그녀와 사귀는 도중, 민기의 허락도 없이 찍어댄 흑백 사진들로 도배가 되어 있다시피 했다.
‘미련은 애저녁에 버렸어도, 추억없이 사는 건 못견디겠드만……’
민기나 희진이나, 가슴속에 털어버릴 수 없는 앙금이 남아 있기는, 마찬가지 였다. 지나간 옛사랑의 그림자는 아니었다고 할지라도, 두 사람 사이에 분명코 존재했던 그 감정의 흔들림들….그건 섹스를 앞둔 동물적인 발정이었다고 치부하기에는, 너무 진한 커피향 같은 여운이 존재함을 두 사람 모두 느끼고는 있었다.
‘사는 게 사는게 아니더라구……그거 알아?......그저 눈을 뜨고, 밥을 쳐넣고….잠을 자고…..그냥 살아대는 나날…..너 같은 새끼가 감히 상상이나 하겠니? 마누라 씹꾸녕이나 빨고 있었겠지…..’
담배를 쥔 그녀의 손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고, 그 가는 손가락을 타고, 어느 사이엔가 말간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민기는 묵묵히 내려다 보고만 있었다.